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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史記)/사기열전(史記列傳)

[사기열전(史記列傳) 관안열전(管晏列傳) (1/2)] 나를 알아준 사람은 포숙이다 [관포지교(管鮑之交)]

by प्रज्ञा 2023. 1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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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시대 제나라의 명재상으로 이름을 떨친 관중과 안영은 시간적으로는 100년의 차이가 난다. 40여 년 동안 제나라의 재상을 지내면서 모든 방면에서 개혁을 단행했고 환공을 춘추시대 첫 번째 패자로 만들었다. 출신이 보잘것없던 관중이 재상이 되어 능력을 발휘한 것은 전적으로 포숙의 추천 덕분이었다. 사마천은 이런 포숙의 능력을 더 높이 보는듯하다. 안영은 제나라 영공, 장공, 경공 3대에 걸쳐 재상을 지내면서 제나라의 중흥을 이끌었다. 이인자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귀감이 된다고 평가받는 사람이다. 또한, 평생 절제하는 삶을 살았던 안영은 옷 한 벌로 30년을 지냈을 만큼 검소함으로 유명하다. 

 

管仲夷吾者, 潁上人也. 少時常與鮑叔牙游, 鮑叔知其賢. 管仲貧困, 常欺鮑叔, 鮑叔終善遇之, 不以爲言. 已而鮑叔事齊公子小白, 管仲事公子糾. 及小白立爲桓公, 公子糾死, 管仲囚焉. 鮑叔遂進管仲. 管仲既用, 任政於齊, 齊桓公以霸, 九合諸侯, 一匡天下, 管仲之謀也. 

관중 오이는(管仲夷吾者), 영수 가의 사람이다(潁上人也). 어릴 때(少時) 늘(常) 포숙아와 더불어 놀았고(與鮑叔牙游), 포숙아는(鮑叔) 그의 현명함을 알았다(知其賢). 관중이(管仲) 가난해서(貧困), 늘(常) 포숙아를 속였는데(欺鮑叔), 포숙아는(鮑叔) 끝까지(終) 그를 잘 대해주고(善遇之), 말하지 않았다(不以爲言). 나중에(已而) 포숙아는(鮑叔) 제나라 공자 소백을 섬기고(事齊公子小白), 관중은 공자 규를 섬겼다(管仲事公子糾). 소백이 환공이 되어(及小白立爲桓公), <싸움에 진> 공자 규가 죽고(公子糾死), 관중은 죄인이 되었다(管仲囚焉). 포숙아가(鮑叔) 곧(遂) 관중을 천거했다(進管仲). 관중이 등용되고 나서(管仲旣用), 제나라에서 정치를 맡아(任政於齊), 제환공이 패자가 되었고(齊桓公以霸), 제후들을 모아(九合諸侯), 천하를 바로잡은 것은(一匡天下), 관중의 계략 덕분이다(管仲之謀也). 

 

* 善遇(선우), 善遇(선대): 친절(親切)하게 잘 대접(待接)함.

* 九合(구합): 九合은 ‘구합’으로 읽어 ‘아홉 번 회합하다’라고 풀이하기도 하고, ‘규합’으로 읽어 ‘감독하여 회합하다’라고 풀이하기도 한다. 아홉 번은 군용(軍用) 수레로 모인 것이 세 번이고 승용(乘用) 수레로 모인 것이 여섯 번이다.”라고 하였다.(論語 憲問) 合은 회맹(會盟)으로 제후와 제후가 만나서 맹약을 맺는다는 뜻이다.

* 一匡(일광): 어지러운 천하(天下)를 다스려 바로잡음. 은 바로잡다는 뜻이다. 

 

管仲曰: "吾始困時, 嘗與鮑叔賈, 分財利多自與, 鮑叔不以我爲貪, 知我貧也. 吾嘗爲鮑叔謀事而更窮困, 鮑叔不以我爲愚, 知時有利不利也. 吾嘗三仕三見逐於君, 鮑叔不以我爲不肖, 知我不遭時也. 吾嘗三戰三走, 鮑叔不以我怯, 知我有老母也. 公子糾敗, 召忽死之, 吾幽囚受辱, 鮑叔不以我爲無恥, 知我不羞小睗而恥功名不顯于天下也. 生我者父母, 知我者鮑子也." 

관중이 말하길(管仲曰): "내가(吾) 처음(始) 어려웠을 때(困時), 일찍(嘗) 포숙아와 더불어 장사하면서(與鮑叔賈), 이익을 나눌 때(分財利) 나에게 많이 주었는데(多自與), 포숙아가(鮑叔) 나를(以我) 탐욕스럽다고 여기지 않았는데(爲貪), 내가 가난한 것을 알아서다(知我貧也). 내가 일찍이(吾嘗) 포숙아를 위해(爲鮑叔) 일을 도모하다가(謀事而) 도리어(更) <포숙아를> 곤란하게 만들었는데(窮困), 포숙아는(鮑叔) 나를(以我) 어리석다고 여기지 않았는데(爲愚), 때에는(時) 유리한 때와 불리한 때가 있음을 알아서다(有利不利也). 내가 일찍이(吾嘗) 세 번 벼슬하고(三仕) 세 번 임금에게서 쫓겨났는데(三見逐於君), 포숙아는(鮑叔) 나를(以我) 못났다고 여기지 않았는데(爲不肖), 내가 때를 만나지 못했음을(我不遭時) 알아서다(也). 내가 일찍이(吾嘗) 세 번 싸움에 나가(三戰) 세 번 도망갔는데(三走), 포숙아는(鮑叔) 나를(以我) 겁쟁이라고 여기지 않았는데(怯), 나에게 노모가 있음을 알아서다(知我有老母也). 공자 규가 <싸움에> 지고(公子糾敗), 소홀이 죽고(召忽死之), 나는(吾) 잡혀 갇히고(幽囚) 치욕을 받았는데(受辱), 포숙아는(鮑叔) 나를(以我)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았으니(爲無恥), 내가(我) 작은 일을(小睗) 부끄러워하지 않지만(不羞而) 공명이(功名) 천하에(于天下) 드러나지 않는 것을 부끄러워함을 알았다(恥不顯也). 나를 낳은 사람은(生我者) 부모지만(父母), 나를 아는 사람은(知我者) 포숙아다(鮑子也)." 

 

* 幽囚(유수): 잡아서 가둠.

 

鮑叔旣進管仲, 以身下之. 子孫世祿於齊, 有封邑者十餘世, 常爲名大夫. 天下不多管仲之賢而多鮑叔能知人也. 

포숙아가(鮑叔) 관중을 천거하고 나서(旣進管仲), 자신은(以身) 아랫사람이 되었다(下之). 자손이(子孫) 제나라에서 세록을 받고(世祿於齊), 봉읍을 가진 것이(有封邑者) 10여 세가 되었고(十餘世), 늘(常) 이름난 대부로 여겨졌다(爲名大夫). 천하 사람들이(天下) 관중을 현명함을 많이 칭찬하지 않지만(不多管仲之賢而) 포숙아가(鮑叔) 사람 잘 알아보는 것을(能知人) 많이 칭찬했다(也). 

창고가 가득 차야 예절을 안다

 

管仲任政相齊, 以區區之齊在海濱, 通貨積財, 富國彊兵, 與俗同好惡. 故其稱曰: "倉廩實而知禮節, 衣食足而知榮辱, 上服度則六親固. 四維不張, 國乃滅亡. 下令如流水之原, 令順民心." 故論卑而易行. 俗之所欲, 因而予之; 俗之所否, 因而去之. 

관중이(管仲) 제나라에서 재상이 되어(相齊) 정치를 맡은 뒤로(任政), 작고 보잘것없는 제나라가(以區區之齊) 바닷가에 있어(在海濱), 재화를 통하게 하고(通貨) 재물을 쌓아(積財),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富國) 군대를 강하게 하여(彊兵), 백성과 더불어(與俗) 좋고 나쁜 것을 함께 했다(同好惡). 그러므로(故) 그가 일컬어 말하길(其稱曰): "창고가 가득 차면(倉廩實而) 예절을 알고(知禮節), 의식이 풍족하면(衣食足而) 명예와 치욕을 알고(知榮辱), 임금이 법도를 따르면(上服度則) 육친의 <결속>이 굳어진다(六親固). 사유가 펼쳐지지 않으면(四維不張), 나라가(國) 바로 멸망한다(乃滅亡). 명령을 내린 것이(下令) 흐르는 물의 근원과 같다면(如流水之原), 명령이(令) 민심에 순응한다(順民心)."라고 했다. 그러므로(故) 의논한 것이 낮았지만(論卑而) 쉽게 실행되었다(易行). 백성이 바라는 것은(俗之所欲), 따라서 베풀고(因而予之); 백성이 싫어하는 것은(俗之所否), 따라서 없애주었다(因而去之). 

 

* 四維(사유): 국가(國家)를 유지(維持)하는데 필요(必要)한 예(: 예절), 의(: 법도) 염(: 염치), 치(: 부끄러움)의 네 가지.

 

其爲政也, 善因禍而爲福, 轉敗而爲功. 貴輕重, 愼權衡. 桓公實怒少姬, 南襲蔡, 管仲因而伐楚, 責包茅不入貢於周室. 桓公實北征山戎, 而管仲因而令燕修召公之政. 於柯之會, 桓公欲背曹沫之約, 管仲因而信之, 諸侯由是歸齊. 故曰: "知與之爲取, 政之寶也." 

그(其) 정치가(爲政也), 화가 되는 것을(因禍) 잘해서(而) 복이 되도록 하고(爲福), 실패할 것을 돌려서(轉敗而) 공을 만들었다(爲功). 경중을 귀하게 여기고(貴輕重), 득실 저울질 하기를 신중하게 했다(愼權衡). 환공이(桓公) 실제로(實) 소희의 일에 화를 내서(怒少姬), 남으로(南) 채나라를 습격하자(襲蔡), 관중이 잇달아(管仲因而) 초나라를 쳐서(伐楚), 포모가(包茅) 주나라 왕실에(於周室) 바쳐지지 않은 것을 추궁했다(不入貢). 환공이(桓公) 실제로(實) 북으로 산융을 정벌하자(北征山戎, 而) 관중이 <이를> 기회로(管仲因而) 연나라로 하여금(令燕) 소공의 정치를 닦도록 했다(修召公之政). 가 땅이 회맹에서(於柯之會), 환공이(桓公) 조말과의 약속을 어기려 하자(欲背曹沫之約), 관중이 인하여(管仲因而) 믿음을 세우도록 하고(信之), 제후들이(諸侯) 이것으로 인해(由是) 제나라에 귀의했다(歸齊). 그러므로 말하길(故曰): "주는 것이(與之) 취하는 것임을 아는 것이(爲取), 정치의 보대다(政之寶也)."라고 했다.

 

* 包茅(포모): 초나라의 특산물인 푸른 띠 풀(참억새)을 말하며 제사용 술을 거를 때 사용한다.

 

管仲富擬於公室, 有三歸·反坫, 齊人不以爲侈. 管仲卒, 齊國遵其政, 常彊於諸侯. 後百餘年而有晏子焉. 

관중의 부가(管仲富) 공실에 버금가고(擬於公室), 삼귀와 반점을 가졌어도(有三歸·反坫), 제나라 사람들이(齊人) 사치스럽다고 여기지 않았다(不以爲侈). 관중이 죽고(管仲卒), 제나라가(齊國) 그 정책을 따라서(遵其政), 늘(常) 제후들에 보다 강했다(彊於諸侯). [관중이 죽은] 뒤로(後) 100여 년이 지나(百餘年而) 안자가 있었다(有晏子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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