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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진보(古文眞寶) 후집24

[고문진보(古文眞寶) 후집 21 원결(元結) 대당중흥송(大唐中興頌)] 당나라를 중흥시킨 공적을 찬양함 [해설] 安祿山反, 明皇幸蜀. 肅宗時爲太子 自卽位於靈武, 命郭子儀ㆍ李光弼, 復兩京, 迎明皇還京師, 唐業中興.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켰다(安祿山反), 명황(현종)이(明皇) 촉으로 행차했다(幸蜀). 숙종이(肅宗) 당시(時) 태자가 되어(爲太子) 스스로(自) 영무에서 즉위했다(卽位於靈武), 곽자의와 이광필에게 명령해서(命郭子儀ㆍ李光弼), 양경을 수복하고(復兩京), 명황을 맞이해서(迎明皇) 경사로 돌아오게 하니(還京師), 당나라의 왕업이(唐業) 다시 일어났다(中興). 元結, 遂於湖南永州祁陽縣南之浯溪石崖上, 刻此頌, 顔魯公眞卿書之, 後人, 因名磨崖碑, 詩人文士, 論此事者多矣. 黃山谷之「題磨崖碑」, 楊誠齋之「浯溪賦」, 皆是也而范石湖一詩, 尤明言之焉. 謂: “頌者, 美盛德之形容, 次山, 乃以魯史筆法, 婉辭含譏, 後之詞.. 2024. 2. 27.
[고문진보(古文眞寶) 후집 20 장온고(張蘊古) 대보잠(大寶箴)] 당 태종을 경계하려는 글(작성 중) 聖人之大寶曰位, 此篇, 專箴人主以守位之難. 盖自唐太宗初卽位時, 張蘊古直中書省, 乃上「大寶箴」, 其辭委曲, 可是鑑戒. 성인의 큰 보물을(聖人之大寶) 위라 하고(曰位), 이 편은(此篇), 오로지(專) 자리를 지키는 어려움으로(以守位之難) 임금을 경계한 것이다(箴人主). 대체로(盖) 당태종이 처음 즉위할 때부터(自唐太宗初卽位時), 장온고가 중서성에 숙직하며(張蘊古直中書省), 곧(乃) 대보잠을 올렸으니(上「大寶箴」), 그 말이 자세하고 소상해서(其辭委曲), 교훈이 될만했다(可是鑑戒). * 委曲(위곡): 자세(仔細)하고 소상(昭詳)함. 또는 그 곡절(曲折). * 鑑戒(감계): 교훈(敎訓)이 될 만한 본보기(本--), 지난 잘못을 거울로 삼아 다시는 잘못을 되풀이하지 아니하도록 하는 경계(警戒). 임금의 역할과 자.. 2024. 2. 27.
[고문진보(古文眞寶) 후집 19 이백(李白) 여한형주서(與韓荊州書)] 형자 한자사에게 자기를 추천하는 글 韓朝宗, 元宗時人. 爲荊州刺史, 人皆景慕之. 李白與此書膾炙人口, 學者不可不讀. 한조종은(韓朝宗), 원종 때 사람이다(元宗時人). 형주자사가 되어(爲荊州刺史), 사람들이 모두(人皆) 우러러보아 사모했다(景慕之). 이백이(李白) 이 편지를 주어(與此書)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렸으니(膾炙人口), 학자들은(學者) 읽지 않을 수 없다(不可不讀). * 景慕(경모): 우러러 사모(思慕)함. 한조종을 만나고 싶어 하는 마음 白聞, 天下談士, 相聚而言曰: “生不用封萬戶侯, 但願一識韓荊州.” 何令人之景慕, 一至於此. 豈不以周公之風, 躬吐握之事, 使海內豪俊, 奔走而歸之. 제(이백)가 들으니(白聞), 천하의 담론 하는 선비들이(天下談士), 서로 모여(相聚而) 말하길(言曰): “살아서(生) 만호후에 봉해지지 않더라도(不用封.. 2024. 2. 25.
[고문진보(古文眞寶) 후집 18 이백(李白)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 봄날 밤에 도리원 연회에서 지은 시집의 서문 夫天地者萬物之逆旅, 光陰者百代之過客. 무릇(夫) 천지란 것은(天地者) 만물의(萬物之) 여관이고(逆旅), 시간이란(光陰者) 백 대의(百代之) 지나가는 손님이다(過客). * 逆旅(역려): ‘나그네를 맞이한다.’는 뜻으로, ‘여관(旅館)’을 이르는 말. * 光陰(광음): ‘햇빛과 그늘, 즉 낮과 밤’이라는 뜻으로, 시간(時間)이나 세월(歲月)을 이르는 말. 而浮生若夢, 爲歡幾何? 덧없는 인생(而浮生) 꿈과 같으니(若夢), 즐기는 것이(爲歡) 얼마나 되겠는가(幾何)? * 浮生(부생): 덧없는 인생 * 幾何(기하): 얼마 古人秉燭夜遊, 良有以也. 옛사람이(古人) 촛불을 잡고(秉燭) 밤에 노닌 것은(夜遊), 진실로(良) 까닭이 있구나(有以也). * 良有以也: 良은 '진실로', 以는 원인, 근거를 나타내므로 '까닭'.. 2024. 2. 24.
[고문진보(古文眞寶) 후집 17 왕발(王勃) 등왕각서(滕王閣序)] 등왕각에서 느낀 인생무상(작성 중) 등왕각(滕王閣)은 장시성 난창에 있는 누각으로 악양의 악양루, 우한의 황학루와 함께, 《강남 3대 누각》으로 불린다. 당나라 때인 653년(영휘 4년) 이 땅에 봉해진 이원영(당 고조의 22번째 아들)의 도락에 의해서 지어졌다. 짓고 나서 20년이 지나 홍주도독이 재건하고 여러 문인들로 하여금 시를 짓게 했는데 이 중에서 왕발의 등왕각서가 유명하다. 서문을 지은 사연 唐高祖子元嬰, 爲洪州刺史, 置此閣, 時封騰王, 故曰: ‘騰王閣.’ 咸亨二年, 閻伯嶼爲洪州牧, 大宴于此, 宿命其壻, 爲序以誇客. 因出紙筆遍請客, 莫敢當. 勃在席最少, 受之不辭, 都督怒, 遣吏伺其文, 輒報. 一再報, 語益奇, 乃瞿然曰: “天才也.” 請遂成文, 極歡而罷. 勃字子安, 少有逸才, 高宗召爲博士, 因作鬪鷄檄文, 高宗怒, 謂有交構之漸乃黜... 2024. 2. 24.
[고문진보(古文眞寶) 후집 16 공치규(孔稚圭) 북산이문(北山移文)] 북산의 신령이 주옹에게 보내는 경고 孔稚圭, 字德璋, 會稽人. 少涉學有美譽, 仕至太子詹事. 鍾山在郡北, 其先周彦倫隱於北山, 後應詔出爲海鹽縣令. 欲却適北山, 孔生乃假山靈之意移之, 使不許再至, 故云「北山移文」, 迂齋云: “建康蔣山, 是也.” 공치규는(孔稚圭), 자가 덕장이고(字德璋), 회계 사람이다(會稽人). 어려서(少) 학문을 섭렵해(涉學) 아름다운 명예가 있었다(有美譽), 벼슬이(仕) 태자첨사에 이르렀다(至太子詹事). 종산은(鍾山) 군의 북쪽에 있고(在郡北), 그 먼저(其先) 주언륜이(周彦倫) 북산에 은거했다(隱於北山), 나중에(後) 부름에 응해(應詔) 나가서(出) 해렴 현령이 되었다(爲海鹽縣令). 북산에 가려고 하자(欲却適北山), 공생이(孔生) 이에(乃) 산령의 뜻을 빌려(假山靈之意) 이문을 지어(移之), 다시 오는 것을(再至) 허락하지.. 2024. 2. 18.
[고문진보(古文眞寶) 후집 15 도연명(陶淵明)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 다섯 그루 버드나무집 선생 陶淵明, 門栽五柳, 因自著「五柳先生傳. 도연명은(陶淵明), 문에(門)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를 심고(栽五柳), 인하여(因) 스스로(自) 오류선생전을 지었다(著五柳先生傳). 先生不知何許人, 亦不詳其姓字, 宅邊有五柳樹, 因以爲號焉. 선생이(先生)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고(不知何許人), 또한(亦) 그 성과 자도 확실하지 않지만(不詳其姓字), 집 주변에(宅邊)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가 있어(有五柳樹), 이것으로 인하여(因以) 호를 삼았다(爲號焉). * 何許(하허): 어느 곳, 何許人(하허인): 어떠한 사람. 閑靖少言, 不慕榮利. 好讀書, 不求甚解, 每有意會, 便欣然忘食. 性嗜酒, 家貧, 不能常得, 親舊知其如此, 或置酒而招之, 造飮輒盡, 期在必醉, 旣醉而退, 曾不吝情去留. 한가롭고 편안하며(閑靖) 말이 적었고(少言.. 2024. 2. 16.
[고문진보(古文眞寶) 후집 14 도연명(陶淵明) 귀거래사(歸去來辭)] 나, 돌아갈래! 귀거래사는 중국 동진 시대의 시인인 도연명이 41세가 되던 해 가을, 팽택(彭澤, 장시성 심양 부근)의 현령을 그만두고 고향(심양)으로 돌아가면서 지은 산문시다. 어느 날 도연명은 군에서 보낸 감독관에게 예복을 입고 가서 뵈라는 명을 받았다고 한다. 이에 탄식하며 "내 닷 말 곡식 때문에 소인 앞에 허리를 꺾을 수 없다"라고 하면서 그날로 사표를 냈다고 한다. 글을 지은 배경 朱文公曰: “「歸去來辭」者, 晉處士陶淵明之所作也. 潛有高志遠識, 不能俯仰時俗. 嘗爲彭澤令, 督郵行縣且至, 吏白‘當束帶見之,’ 潛歎曰: ‘吾安能爲五斗米, 折腰向鄕里小兒耶?’ 卽日解印綏去, 作此詞, 以見志. 後以劉裕將移晉祚, 恥事二姓, 遂不復仕, 宋文帝時, 特徵不至, 卒諡靖節徵士. 歐陽公言, ‘兩晉, 無文章, 幸獨有此篇耳. 然其詞義夷曠.. 2024. 2. 16.
[고문진보(古文眞寶) 후집 13 이밀(李密) 진정표(陳情表)] 조모를 봉양하려고 관직을 사양하면서 올린 글 이밀(李密, 224년 ~ 287년)은 중국 삼국시대 건위군 무양(武陽) 출신으로, 자(字)는 영백(令伯), 일명은 건(虔)이다. 진(晉)의 무제(武帝)는 그를 태자선마(太子洗馬)로 삼으려 했으나, 조모(祖母) 유(劉)씨의 병환 때문에 사양하면서 태시(泰始) 3년에 무제(武帝)에게 상주문(上奏文)으로 진정사표를 올렸다. 무제는 감동하여 노비와 식량을 하사하였다. 이밀의 진정표는 효심이 잘 표현한 문장으로, 후세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蜀志』, “李密父早亡, 母何氏更適人. 密見養於祖母, 以孝聞, 侍疾, 日夜未嘗解帶. 蜀平, 晉帝徵爲太子洗馬, 密上表, 帝嘉其誠款, 賜奴婢二人, 使郡縣供祖母奉膳服, 遷漢中太守.” 촉지에(『蜀志』), “이밀의 아버지가(李密父) 일찍 죽고(早亡), 어머니 하씨가(母何氏) 다시(.. 2024. 2. 14.
[고문진보(古文眞寶) 후집 12 왕희지(王羲之) 난정기(蘭亭記)] 난정에서 모여 지은 시문을 모은 글의 서문 영화 9년 난정에서 연 시회 永和九年歲在癸丑暮春之初, 會于會稽山陰之蘭亭, 修禊事也. 群賢畢至, 少長咸集. 此地有崇山峻嶺, 茂林修竹, 又有淸流激湍, 映帶左右, 引以爲流觴曲水. 영화 9년(永和九年) 계축년(歲在癸丑) 늦은 봄 초에(暮春之初), 회계산 북쪽의(會稽山陰之) 난정에 모여(會于蘭亭), 계제사를 지냈다(修禊事也). 여러 어진 사람이(群賢) 모두 오고(畢至), 젊은이와 늙은이가(少長) 함께 모였다(咸集). 이 땅에(此地) 높은 산과 험준한 봉우리가 있고(有崇山峻嶺), 무성한 숲과 긴 대나무가 있고(茂林修竹), 또(又) 맑은 물과 격한 여울이 있어(有淸流激湍), 반사해서(映) 좌우로 띠처럼 둘렀는데(帶左右), 끌어다가(引以) 잔을 띄울 물을 만들었다(爲流觴曲水). * 歲在癸丑: 그 해의 간지가 癸丑이라는.. 2024. 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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