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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史記)/사기열전(史記列傳)

[사기열전(史記列傳) 71 저리자감무열전(樗里子甘茂列傳) 3/3] 열두 살에 재상이 되다 / 감라자천(甘羅自薦) / 연령불문(年齡不問)

by प्रज्ञा 2024. 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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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甘羅者, 甘茂孫也. 茂既死後, 甘羅年十二, 事秦相文信侯呂不韋. 

16 감라는(甘羅者), 감무의 손자다(甘茂孫也). 감무가(茂) 죽은 뒤에(既死後), 감라의 나이(甘羅年) 열두 살이 되어(十二), 진날 재상(秦相) 문신후 여불위를 섬겼다(文信侯呂不韋). 


17 秦始皇帝使剛成君蔡澤於燕, 三年而燕王喜使太子丹入質於秦. 秦使張唐往相燕, 欲與燕共伐趙以廣河閒之地. 張唐謂文信侯曰: "臣嘗爲秦昭王伐趙, 趙怨臣, 曰: '得唐者與百里之地.' 今之燕必經趙, 臣不可以行." 文信侯不快, 未有以彊也. 甘羅曰: "君侯何不快之甚也?" 文信侯曰: "吾令剛成君蔡澤事燕三年, 燕太子丹已入質矣, 吾自請張卿相燕而不肯行." 甘羅曰: "臣請行之." 文信侯叱曰: "去!我身自請之而不肯, 女焉能行之?" 甘羅曰: "大項橐生七歲爲孔子師. 今臣生十二歲於茲矣, 君其試臣, 何遽叱乎?" 於是甘羅見張卿曰: "卿之功孰與武安君?" 卿曰: "武安君南挫彊楚, 北威燕、趙, 戰勝攻取, 破城墮邑, 不知其數, 臣之功不如也." 甘羅曰: "應侯之用於秦也, 孰與文信侯專?" 張卿曰: "應侯不如文信侯專." 甘羅曰: "卿明知其不如文信侯專與?" 曰: "知之." 甘羅曰: "應侯欲攻趙, 武安君難之, 去咸陽七里而立死於杜郵. 今文信侯自請卿相燕而不肯行, 臣不知卿所死處矣." 張唐曰: "請因孺子行." 令裝治行. 

17 진 시황제가(秦始皇帝) 강성군 채택을(剛成君蔡澤) 연나라에 사신으로 보냈고(使於燕), 삼 년이 지나(三年而) 연왕 희가(燕王喜) 태자 단을(使太子丹) 진나라에 인질로 보냈다(入質於秦). 진나라가(秦) 장당을 보내(使張唐往) 연나라에서 재상을 시키고(相燕), 연나라와 함께(與燕共) 조나라를 쳐서(伐趙以) 하간의 땅을 넓히려고 했다(廣河閒之地).

장당이(張唐) 문신후에게 말하길(謂文信侯曰): "신이(臣) 일찍이(嘗) 진 소왕을 위해(爲秦昭王) 조나라를 쳤는데(伐趙), 조나라가 신을 원망하며(趙怨臣), 말하길(曰): '장당을 얻어(잡아) 오는 사람에게(得唐者) 백 리의 땅을 주겠다(與百里之地).'라고 했다. 지금(今) 연나라에 가려면(之燕) 반드시(必) 조나라를 지나가야 하는데(經趙), 신이(臣) 갈 수가 없습니다(不可以行)."라고 했다. 문신후가(文信侯) 불쾌하지만(不快), 강제로 할 수 없었다(未有以彊也).

감라가 말하길(甘羅曰): "군후께서는(君侯) 어찌(何) 불쾌함이 심한가요(不快之甚也)?"라고 했다.

문신후가 말하길(文信侯曰): "내가(吾) 강성군 채택을 시켜(令剛成君蔡澤) 연나라를 섬긴 것이(事燕) 3년이 되었고(三年), 연나라 태자 단이(燕太子丹) 이미(已) 인질로 들어왔기에(入質矣), 내가(吾) 직접(自) 장경이 연나라에서 재상을 하라고 청했는데(請張卿相燕而) 기꺼이 가려고 하지 않는다(不肯行)."라고 했다.

감라가 말하길(甘羅曰): "신이(臣) 그에게 가도록 청하겠습니다(請行之)."라고 했다.

문신후가 꾸짖으며 말하길(文信侯叱曰): "물러가라(去)! 내가(我) 직접(身自) 청했는데도(請之而) 하지 않으려는데(不肯), 네가(女) 어찌(焉) 할 수 있겠느냐(能行之)?"라고 했다.

감라가 말하길(甘羅曰): "큰 항탁은(大項橐) 태어나서 7년 만에(生七歲) 공자의 스승이 되었습니다(爲孔子師). 지금(今) 신이 태어나(臣生) 지금(於茲) 12년 되었으니(十二歲矣), 군께서(君) 신을 시험하시면 되는데(其試臣), 어찌(何遽) 꾸짖으십니까(叱乎)?"라고 했다.

이에(於是) 감라가(甘羅) 장경을 만나서 말하길(見張卿曰): "경의 공이(卿之功) 무안군과 비교해서(與武安君) 누가 더 뛰어난 가요(孰)?"라고 했다.

장경이 말하길(卿曰): "무안군은(武安君) 남으로(南) 강한 초나라를 꺾고(挫彊楚), 북으로(北) 연나라와 조나라를 위협하고(威燕、趙), 싸우면 이기고(戰勝) 공격하면 얻으니(攻取), 성을 깨뜨리고(破城) 읍을 무너뜨린 것이(墮邑), 그 수를 알 수 없으니(不知其數), 신의공이(臣之功) 못하다(不如也)."라고 했다.

감라가 말하길(甘羅曰): "응후가(應侯之) 진나라에서 쓰이는 것이(用於秦也), 문신후가 오로지 하는 것과 비교해서(與文信侯專) 누가 더합니까(孰)?"라고 했다.

장경이 말하길(張卿曰): "응후가(應侯) 문신후가 오로지 하는 것만(文信侯專) 못하다(不如)."라고 했다.

감라가 말하길(甘羅曰): "경은(卿) <응후가> 문신후가 오로지 하는 것보다(文信侯專) 못함을(其不如) 분명히 아십니까(明知與)?"라고 했다.

말하길(曰): "안다(知之)."라고 했다.

감라가 말하길(甘羅曰): "응후가(應侯) 조나라를 공격하려고 하자(欲攻趙), 무안군이 그것을 어렵게 여겨 <비난하고>(武安君難之), 함양에서 7리 떨어진 곳에서(去咸陽七里而) 두우에서 멈추어 죽었습니다(立死於杜郵). 지금(今) 문신후가(文信侯) 스스로 (自) 경이 연나라의 재상이 되도록 청했는데(卿相燕而) 가려고 하지 않으니(不肯行), 신은(臣) 경이(卿) 죽을 곳을(所死處) 알지 못하겠습니다(不知矣)."라고 했다.

장당이 말하길(張唐曰): "청컨대(請) 젊은이 <말대로>(因孺子) 가겠소(行)."라고 했다. 길 떠날 채비를 했다(令裝治行). 


18 行有日, 甘羅謂文信侯曰: "借臣車五乘, 請爲張唐先報趙." 文信侯乃入言之於始皇曰: "昔甘茂之孫甘羅, 年少耳, 然名家之子孫, 諸侯皆聞之. 今者張唐欲稱疾不肯行, 甘羅說而行之. 今願先報趙, 請許遣之." 始皇召見, 使甘羅於趙. 趙襄王郊迎甘羅. 甘羅說趙王曰: "王聞燕太子丹入質秦歟?" 曰: "聞之." 曰: "聞張唐相燕歟?" 曰: "聞之." 「燕太子丹入秦者, 燕不欺秦也. 張唐相燕者, 秦不欺燕也. 燕、秦不相欺者, 伐趙, 危矣. 燕、秦不相欺無異故, 欲攻趙而廣河閒. 王不如齎臣五城以廣河閒, 請歸燕太子, 與彊趙攻弱燕." 趙王立自割五城以廣河閒. 秦歸燕太子. 趙攻燕, 得上谷三十城, 令秦有十一. 

18 떠나는 날이 정해지고(行有日), 감라가(甘羅) 문신후에게 말하길(謂文信侯曰): "신에게 전차 다섯 대를 빌려주시고(借臣車五乘), 청컨대(請) 장당을 위하여(爲張唐) 먼저 조나라게 보고하도록 해주십시오(先報趙)."라고 했다.

문신후가(文信侯) 이에(乃) <궁에? 들어가(入) 시황제에게 말하기를(言之於始皇曰): "예전(昔) 감무의 손자인 감라가(甘茂之孫甘羅), 나이가 어리지만(年少耳), 그러나(然) 명가의 자손이라서(名家之子孫), 제후들이(諸侯) 모두(皆) 들어 알고 있습니다(聞之). 지금(今者) 장당이(張唐) 병을 핑계로(稱疾) 기꺼이 가려고 하지 않았는데(不肯行), 감라가 설득해서(甘羅說而) 가도록 했습니다(行之). 지금(今) 원컨대(願) 먼저 조나라에 알리기를 바라니(先報趙), 그를 보내기를 청합니다(請許遣之)."라고 했다.

시황제가(始皇) 불러서 보고는(召見), 감라를(甘羅) 조나라에(於趙) 사자로 보냈다(使). 조 양왕이(趙襄王) 교외에서(郊) 감마를 맞이했다(迎甘羅).

감라가(甘羅) 조왕을 설득해 말하길(說趙王曰): "왕께서는(王) 연나라 태자 단이(燕太子丹) 진나라에 인질로 들어온 것을(入質秦) 들었습니까(歟)?"라고 했다.

<조왕이> 말하길(曰): "들었다(聞之)."

<감라가> 말하길(曰): "장당이(張唐) 연나라에서 재상노릇 할 것이라는 말은(相燕) 들었습니까(歟)?"라고 했다.

<조왕이> 말하길(曰): "들었다(聞之)."

"연나라 태자 단이(燕太子丹) 진나라에 들어온 것은(入秦者), 연나라가(燕) 진나라를 속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不欺秦也). 장당이(張唐) 연나라에서 재상노릇 하는 것은(相燕者), 진나라가(秦) 연나라를 속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不欺燕也). 연나라와 진나라가(燕、秦) 서로 속이지 않으면(不相欺者), 조나라 칠 것이고(伐趙), 위험합니다(危矣). 연나라와 진나라가(燕、秦) 서로 속이지 않는 것은(不相欺) 다른 까닭이 없고(無異故), 조나라를 공격해서(攻趙而) 하간의 땅을 넓히려고 해서입니다(廣河閒). 왕께서는(王) 신에게 성 다섯 개를 주고(齎臣五城以) 하간 땅을 넓히게 하고(廣河閒), 연나라 태자가 돌아가도록 청해서(請歸燕太子), <진나라가> 강한 조나라와(與彊趙) 약한 연나라를 공격하는 것만(攻弱燕) 못합니다(不如)."라고 했다.

조왕이(趙王) 그 자리에서(立) 스스로 다섯 성을 떼어(自割五城以) 하간의 땅을 넓히도록 했다(廣河閒). 진나라가(秦) 연나라 태자를 돌려보냈다(歸燕太子). 조나라가 연나라를 공격해서(趙攻燕), 상곡의 30개 성을 빼앗아(得上谷三十城), 진나라로 하여금(令秦) 열한 개를 가지도록 했다(有十一). 

 

19 甘羅還報秦, 乃封甘羅以爲上卿, 復以始甘茂田宅賜之. 

19 감라가(甘羅) 돌아와(還) 진나라에 보고하니(報秦), 곧(乃) 감라를 봉해서(封甘羅以) 상경으로 삼고(爲上卿), 다시(復) 처음 감무의 밭과 집을(以始甘茂田宅) 그에게 주었다(賜之). 

 

20 太史公曰:樗里子以骨肉重, 固其理, 而秦人稱其智, 故頗采焉. 甘茂起下蔡閭閻, 顯名諸侯, 重彊齊楚. 甘羅年少, 然出一奇計, 聲稱後世. 雖非篤行之君子, 然亦戰國之策士也. 方秦之彊時, 天下尤趨謀詐哉. 

20 태사공이 말하길(太史公曰): 저리자가(樗里子) 골육을 중하게 여겨서 <등용된 것은>(以骨肉重), 진실로(固) 그런 이치이고(其理, 而) 진나라가(秦人) 그 지혜를 칭찬했고(稱其智), 그러므로(故) 자못 많이 모았다(頗采焉). 감무가(甘茂) 하채의 미천한 출신에서 일어나(起下蔡閭閻), 제후에게 이름을 드러내고(顯名諸侯), 강한 제나라와 초나라에서 중용되었다(重彊齊楚). 감라는(甘羅) 나이가 어렸지만(年少), 그러나(然) 한 가지 기묘한 계책을 내서(出一奇計), 소리가(聲) 후세에 일컬어졌다(稱後世). 비록(雖) 돈독한 행실의 군자는 아니지만(非篤行之君子), 그러나(然) 또한(亦) 전국시대의 책사다(戰國之策士也). 바야흐로(方) 진나라가 강해지는 때(秦之彊時), 천하가(天下) 더욱(尤) 권모와 속임수로 치달았다(趨謀詐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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