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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史記)/사기열전(史記列傳)

[사기열전(史記列傳) 73 백기왕전열전(白起王翦列傳) 2/2] 각자에게 단점이 있었다 / 척단촌장(尺短寸長)

by प्रज्ञा 2024. 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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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王翦者, 頻陽東鄉人也. 少而好兵, 事秦始皇. 始皇十一年, 翦將攻趙閼與, 破之, 拔九城, 十八年, 翦將攻趙. 歲餘, 遂拔趙, 趙王降, 盡定趙地爲郡. 明年, 燕使荊軻爲賊於秦, 秦王使王翦攻燕. 燕王喜走遼東, 翦遂定燕薊而還. 秦使翦子王賁擊荊, 荊兵敗. 還擊魏, 魏王降, 遂定魏地. 

9 왕전은(王翦者), 빈 양 동향 사람이다(頻陽東鄉人也). 어려서부터(少而) 병법을 좋아했고(好兵), 진시황을 섬겼다(事秦始皇). 시황 11년에(始皇十一年), 왕전이 장군이 되어(翦將) 조나라 연여를 공격해서(攻趙閼與), 무찌르고(破之), 성 9개를 빼앗았고(拔九城), 18년에(十八年), 왕전이 장수가 되어(翦將) 조나라를 공격했다(攻趙). 1년여 만에(歲餘), 마침내(遂) 조나라를 무너뜨리고(拔趙), 조왕이 항복하고(趙王降), 조나라 땅을 모두 평정해서(盡定趙地) 군을 만들었다(爲郡). 다음 해에(明年), 연나라가(燕) 형가를 시켜(使荊軻) 진나라에서(於秦) <진시황을> 죽이도록 하니(爲賊), 진왕이(秦王) 왕전을 시켜(使王翦) 연나라를 공격했다(攻燕). 연왕 희가(燕王喜) 요동으로 달아나고(走遼東), 왕전이(翦) 마침내(遂) 연나라 <수도> 계를 평정하고 돌아왔다(定燕薊而還). 진나라가(秦) 왕전의 아들 왕분을 시켜(使翦子王賁) 형나라를 치고(擊荊), 형나라 군대가 패했다(荊兵敗). <군대를> 돌려(還) 위나라를 공격해서(擊魏), 위왕이 항복하고(魏王降), 마침내(遂) 위나라 땅을 평정했다(定魏地). 


10 秦始皇既滅三晉, 走燕王, 而數破荊師. 秦將李信者, 年少壯勇, 嘗以兵數千逐燕太子丹至於衍水中, 卒破得丹, 始皇以爲賢勇. 於是始皇問李信: "吾欲攻取荊, 於將軍度用幾何人而足?" 李信曰: "不過用二十萬人." 始皇問王翦, 王翦曰: "非六十萬人不可." 始皇曰: "王將軍老矣, 何怯也!李將軍果勢壯勇, 其言是也." 遂使李信及蒙恬將二十萬南伐荊. 王翦言不用, 因謝病, 歸老於頻陽. 李信攻平與, 蒙恬攻寢, 大破荊軍. 信又攻鄢郢, 破之, 於是引兵而西, 與蒙恬會城父. 荊人因隨之, 三日三夜不頓舍, 大破李信軍, 入兩壁, 殺七都尉, 秦軍走. 

10 진시황이(秦始皇) 이미 삼진을 없애고(既滅三晉), 연왕을 달아나게 만들었고(走燕王, 而) 여러 번(數) 형나라 군대를 격파했다(破荊師). 진나라 장수(秦將) 이신은(李信者), 나이가 어리고 용맹스러워(年少壯勇), 일찍이(嘗) 병사 수 천으로(以兵數千) 연나라 태자 단을 뒤쫓아(燕太子丹) 단수 가운데 이르러(至於衍水中), 사졸을 격파하고 단을 잡았는데(卒破得丹), 진시황이(始皇) 어질고 용맹하다고 여겼다(以爲賢勇).

이에(於是) 시황이 이신에게 묻기를(始皇問李信): "내가(吾) 형나라를 공격해서 취하고 싶은데(欲攻取荊), 장군이 헤아리기에(於將軍度) 얼마나 많은 군사를 써야 하겠는가(用幾何人而足)?"라고 했다.

이신이 말하길(李信曰): "20만 명 쓰는 것을 넘지 않습니다(不過用二十萬人)."라고 했다.

시황이 왕전에 묻자(始皇問王翦), 왕전이 말하길(王翦曰): "60만 명이 아니면(非六十萬人) 안됩니다(不可)."라고 했다.

시황이 말하길(始皇曰): "왕장군이 늙었구나(王將軍老矣), 무엇을 겁내는가(何怯也)! 이 장군이(李將軍) 과연(果) 기세가 용맹하다고 하는데(勢壯勇), 그 말이 옳구나(其言是也)."라고 했다.

마침내(遂) 이신과 몽염으로 하여금(使李信及蒙恬) 20만을 거느리고(將二十萬) 남으로 가서(南) 형을 공격하도록 했다(伐荊). 왕전의 말이(王翦言) 쓰이지 않자(不用), 이에(因) 병을 핑계로(謝病), 빈양에 돌아갔다(歸老於頻陽). 이신이(李信) 평여를 공격하고(攻平與), 몽염이 침을 쳐서(蒙恬攻寢), 형나라 군대를 크게 무찔렀다(大破荊軍). 이신이 또(信又) 언과 영을 쳐서(攻鄢郢), 깨뜨리고(破之), 이에(於是) 병사를 이끌고(引兵而) 서쪽으로 가서(西), 몽영과 성보에서 만났다(與蒙恬會城父). 형나라가(荊人) 이에(因) 그들을 뒤쫓아(隨之), 삼일 낮과 잠으로(三日三夜) 먹고 자지 않으면서(不頓舍), 이신의 군대를 크게 무찌르고(大破李信軍), 두 곳의 보루에 들어와(入兩壁), 도위 일곱을 죽이자(殺七都尉), 진나라 군대가 달아났다(秦軍走). 

 

* 壯勇(장용): 건장()하고 용감()함. 또는 그런 청년().


11 始皇聞之, 大怒, 自馳如頻陽, 見謝王翦曰: "寡人以不用將軍計, 李信果辱秦軍. 今聞荊兵日進而西, 將軍雖病, 獨忍棄寡人乎!" 王翦謝曰: "老臣罷病悖亂, 唯大王更擇賢將." 始皇謝曰: "已矣, 將軍勿復言!" 王翦曰: "大王必不得已用臣, 非六十萬人不可." 始皇曰: "爲聽將軍計耳." 於是王翦將兵六十萬人, 始皇自送至灞上. 王翦行, 請美田宅園池甚眾. 始皇曰: "將軍行矣, 何憂貧乎?" 王翦曰: "爲大王將, 有功終不得封侯, 故及大王之向臣, 臣亦及時以請園池爲子孫業耳." 始皇大笑. 王翦既至關, 使使還請善田者五輩. 或曰: "將軍之乞貸, 亦已甚矣." 王翦曰: "不然. 夫秦王怚而不信人. 今空秦國甲士而專委於我, 我不多請田宅爲子孫業以自堅, 顧令秦王坐而疑我邪?" 

11 진시황이 이것을 듣고(始皇聞之), 크게 화를 내며(大怒), 스스로 말을 달려(自馳) 빈양에 가서(如頻陽), 왕전을 만나 사과하며 말하길(見謝王翦曰):

"과인이(寡人) 장군의 계책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以不用將軍計), 이신이(李信) 결국(果) 진나라 군대를 치욕스럽게 만들었다(辱秦軍). 지금 들으니(今聞) 형나라 병사가(荊兵) 날마다(日) 진격해서(進而) 서쪽으로 온다고 하니(西), 장군이(將軍) 비록 병이 있더라도(雖病), 어찌(獨) 과인을 차마 저버릴 수 있겠소(忍棄寡人乎)!"라고 했다.

왕전이 사양하며 말하길(王翦謝曰): "노신이(老臣) 지치고 병들어(罷病) <정신마저> 어두우니(悖亂), 대왕께서는(唯大王) 다시(更) 현명한 장수를 고르십시오(擇賢將)."라고 했다.

시황이 사양하며 말하길(始皇謝曰): "됐다(已矣), 장군은(將軍) 다시 말하지 말라(勿復言)!"라고 했다.

왕전이 말하길(王翦曰): "대왕께서(大王) 반드시(必) 신을 기용해야 한다면(不得已用臣), 60만이 아니면 안 됩니다(非六十萬人不可)."라고 했다.

시황이 말하길(始皇曰): "장군의 계책을 들어줄 뿐이다(爲聽將軍計耳)."라고 했다.

이에(於是) 왕전이(王翦) 60만 명을 이끌고(將兵六十萬人), 시황이(始皇) 직접 송별하며(自送) 파수 가에 이르렀다(至灞上). 왕전이 가면서(王翦行), 아름다운 밭과 택지, 정원과 연못을 요청한 것이(請美田宅園池) 매우 많았다(甚眾).

시황이 말하길(始皇曰): "장군은 가시오(將軍行矣), 어찌(何) 가난함을 걱정하는가(憂貧乎)?"라고 했다.

왕전이 말하길(王翦曰): "대왕을 위해(爲大王) 장군이 되어(將), 공이 있었지만(有功) 끝내(終) 후에 봉해지지 못했고(不得封侯), 그러므로(故) 대왕께서 신을 향할 때(及大王之向臣), 신도 또한(臣亦) 이때에 이르러(及時以) 정원과 택지를 청해서(請園池) 자손의 업으로 만들고 싶을 뿐입니다(爲子孫業耳)."라고 했다.

시황이 크게 웃었다(始皇大笑). 왕전이(王翦) 이미(既) 함곡관에 이르러서도(至關), 사자를 시켜(使使) 또(還) 좋은 밭을 청한 것이(請善田者) 다섯 번이나 되었다(五輩).

누군가 말하길(或曰): "장군의 요청이(將軍之乞貸), 또한(亦) 너무 심합니다(已甚矣)."라고 했다.

왕전이 말하길(王翦曰): "그렇지 한다(不然). 저(夫) 진왕은 교만하고(秦王怚而) 사람을 믿지 않는다(不信人). 지금(今) 진나라 군사를 비워서(空秦國甲士而) 오로지(專) 나에게 맡겼는데(委於我), 내가(我) 자손의 업을 위해(爲子孫業) 논밭과 택지를 많이 요청해서(請田宅以) 스스로 안전하게 하지 않으면(自堅), 진왕이 앉아서 돌아보고는(顧令秦王坐而) 나를 의심할 것이 아니겠는가(疑我邪)?"라고 했다. 


12 王翦果代李信擊荊. 荊聞王翦益軍而來, 乃悉國中兵以拒秦. 王翦至, 堅壁而守之, 不肯戰. 荊兵數出挑戰, 終不出. 王翦日休士洗沐, 而善飲食撫循之, 親與士卒同食. 久之, 王翦使人問軍中戲乎? 對曰: "方投石超距." 於是王翦曰: "士卒可用矣." 荊數挑戰而秦不出, 乃引而東. 翦因舉兵追之, 令壯士擊, 大破荊軍. 至蘄南, 殺其將軍項燕, 荊兵遂敗走. 秦因乘勝略定荊地城邑. 歲餘, 虜荊王負芻, 竟平荊地爲郡縣. 因南征百越之君. 而王翦子王賁, 與李信破定燕·齊地. 

12 왕전이(王翦) 결국(果) 이신을 대신해서(代李信) 형나라를 공격했다(擊荊). 형나라가(荊) 왕전이 군사를 더해(王翦益軍而) 온다는 것을 듣고(來), 이에(乃) 나라의 병사로(悉國中兵以) 진나라에 맞섰다(拒秦). 왕전이 이르자(王翦至), 보루를 견고하게 하고(堅壁而) 지키며(守之), 기꺼이 싸우려 하지 않았다(不肯戰). 형나라 군대가(荊兵) 여러 번(數) 나와서(出) 도전했지만(挑戰), 끝내(終) 나서지 않았다(不出). 왕전은(王翦) 매일(日) 병사를 쉬도록 하고(休士) 목욕을 시키며(洗沐, 而) 좋은 음식과 술로 보살피며(善飲食撫循之), 사졸과 친하게 지내며(親與士卒) 함께 음식을 먹었다(同食). 오래 지나서(久之), 왕전이(王翦) 사람을 시켜(使人) 군중에서 노는 모습을 물었다(問軍中戲乎)

대답하여 말하길(對曰): "돌 던지기와(方投石) 멀리뛰기를 합니다(超距)."라고 했다.

이에 왕전이 말하길(於是王翦曰): "사졸들이 쓸만하구나(士卒可用矣)."라고 했다.

형나라가(荊) 여러 번 도전했지만(數挑戰而) 진나라가 나오지 않자(秦不出), 이에(乃) <군사를> 이끌고(引而) 동쪽으로 갔다(東). 왕전이(翦) 이에(因) 군사를 일으켜 쫓아가며(舉兵追之), 장사들을 시켜(令壯士) 공격해서(擊), 형나라 군대를 크게 무찔렀다(大破荊軍). 기수 남쪽에 이르러(至蘄南), 그 장군 항연을 죽이고(殺其將軍項燕), 형나라 군대가(荊兵) 마침내 패해서 도망쳤다(遂敗走). 진나라가(秦) 이에(因) 승세를 타고(乘勝) 형나라 땅과 성읍을 공략하고 평정했다(略定荊地城邑). 1년 여가 되어(歲餘), 형왕 부추를 사로잡고(虜荊王負芻), 마침내(竟) 형나라 땅을 평정해서(平荊地) 군현으로 삼았다(爲郡縣). 인하여(因) 남으로 가서(南) 백월의 군주를 정벌했다(征百越之君). 그리고(而) 왕전의 아들 왕분은(王翦子王賁), 이신과 함께(與李信) 연나라와 제나라를 깨뜨리고 평정했다(破定燕·齊地). 


13 秦始皇二十六年, 盡并天下, 王氏·蒙氏功爲多, 名施於後世. 

13 진시황 26년(秦始皇二十六年), 천하가 모두 병합되었고(盡并天下), 왕씨와 몽씨의 공이 많아서(王氏·蒙氏功爲多), 이름이(名) 후세에 널리 퍼졌다(施於後世). 


14 秦二世之時, 王翦及其子賁皆已死, 而又滅蒙氏. 陳勝之反秦, 秦使王翦之孫王離擊趙, 圍趙王及張耳鉅鹿城. 或曰: "王離, 秦之名將也. 今將彊秦之兵, 攻新造之趙, 舉之必矣." 客曰: "不然. 夫爲將三世者必敗. 必敗者何也? 必其所殺伐多矣, 其後受其不祥. 今王離已三世將矣." 居無何, 項羽救趙, 擊秦軍, 果虜王離, 王離軍遂降諸侯. 

14 진나라 2세 때(秦二世之時), 왕전과 그 아들 왕분이(王翦及其子賁) 모두(皆) 죽었고(已死, 而) 또(又) 몽씨도 죽었다(滅蒙氏). 진승이(陳勝之) 진나라에 반란을 일으키자(反秦), 진나라가(秦) 왕전의 손자 왕리로 하여금(使王翦之孫王離) 조나라를 치게 했는데(擊趙), 조나라 왕과 장이를(趙王及張耳) 거록성에서 포위했다(鉅鹿城).

누군가 말하길(或曰): "왕리는(王離), 진나라의 명장입니다(秦之名將也). 지금(今) 강한 진나라의 군대를 이끌고(將彊秦之兵), 새로 일어난 조나라를 치면(攻新造之趙), 그들을 함락시키는 것이 반드시 될 것이다(舉之必矣)."라고 했다. 

객이 말하길(客曰): "그렇지 않다(不然). 무릇(夫) 삼대에 걸쳐 장수가 된 사람은(爲將三世者) 반드시 패한다(必敗). 반드시 지는 것은(必敗者) 어째서인가(何也)? 반드시(必) 그 선조가(其) 죽이고 정벌한 것이(所殺伐) 많아서(多矣), 그 후손은(其後) 상서롭지 못한 것을 받을 것이다(受其不祥). 지금(今) 왕리가(王離) 이미(已) 3대에 걸친 장수다(三世將矣)."라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居無何), 항우가 조나라를 구원하고(項羽救趙), 진나라 군대를 공격해서(擊秦軍), 정말(果) 왕리가 포로로 잡혔고(虜王離), 왕리의 군대는(王離軍) 마침내(遂) 제후에게 항복했다(降諸侯). 


15 太史公曰:鄙語云「尺有所短, 寸有所長」. 白起料敵合變, 出奇無窮, 聲震天下, 然不能救患於應侯. 王翦爲秦將, 夷六國, 當是時, 翦爲宿將, 始皇師之, 然不能輔秦建德, 固其根本, 偷合取容, 以至圽身. 及孫王離爲項羽所虜, 不亦宜乎!彼各有所短也. 

15 태사공이 말하길(太史公曰): 속담에 이르길(鄙語云) '척에도(尺) 짧은 것이 있고(有所短), 촌에도(寸) 긴 것이 있다(有所長)'라고 했다. 백기는(白起) 적을 헤아려(料敵) 변화에 맞추고(合變), 기이한 책략을 내는 것이(出奇) 끝이 없어서(無窮), 명성이 천하를 울렸는데(聲震天下), 그러나(然) 응후와의 근심을 해결할 수 없었다(不能救患於應侯). 왕전은(王翦) 진나라 장수가 되어(爲秦將), 여섯 나라를 평정하고(夷六國), 당시(當是時), 왕전이(翦) 공이 많은 장수가 되어(爲宿將), 시황이 그를 스승으로 모셨지만(始皇師之), 그러나(然) 진나라를 보필해서 덕을 세우고(輔秦建德), 그 근본을 굳세게 하지 못하고(不能固其根本), 아첨하다가(偷合取容, 以) 죽음에 이르렀다(至圽身). 손자 왕리에 이르러(及孫王離) 항우에게 포로로 잡혔으니(爲項羽所虜), 또한 마땅하지 않은가(不亦宜乎)! 그들 각자에게(彼各) 단점이 있었다(有所短也). 

 

* 宿將(숙장): 늙고 공로()가 많은 장수(), 경험()이 많아 군사() 지식()이 풍부()한 장수().

* 苟合取容(구합취용): 아부()하여 남의 환심()을 사려고 힘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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