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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史記)/사기열전(史記列傳)

[사기열전(史記列傳) 73 백기왕전열전(白起王翦列傳) 1/2] 하늘에 죄를 지으면 죽음 뿐이다

by प्रज्ञा 2024.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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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白起者, 郿人也. 善用兵, 事秦昭王. 昭王十三年, 而白起爲左庶長, 將而擊韓之新城. 是歲, 穰侯相秦, 舉任鄙以爲漢中守. 其明年, 白起爲左更, 攻韓、魏於伊闕, 斬首二十四萬, 又虜其將公孫喜, 拔五城. 起遷爲國尉. 涉河取韓安邑以東, 到乾河. 明年, 白起爲大良造. 攻魏, 拔之, 取城小大六十一. 明年, 起與客卿錯攻垣城, 拔之. 後五年, 白起攻趙, 拔光狼城. 後七年, 白起攻楚, 拔鄢、鄧五城. 其明年, 攻楚, 拔郢, 燒夷陵, 遂東至竟陵. 楚王亡去郢, 東走徙陳. 秦以郢爲南郡. 白起遷爲武安君. 武安君因取楚, 定巫、黔中郡. 昭王三十四年, 白起攻魏, 拔華陽, 走芒卯, 而虜三晉將, 斬首十三萬. 與趙將賈偃戰, 沈其卒二萬人於河中. 昭王四十三年, 白起攻韓陘城, 拔五城, 斬首五萬. 四十四年, 白起攻南陽太行道, 絕之. 

1 백기는(白起者), 미 땅 사람이다(郿人也). 군사를 잘 다루었고(善用兵), 진나라 소왕을 섬겼다(事秦昭王). 소왕 13년에(昭王十三年, 而) 백기가(白起) 좌서장이 되었고(爲左庶長), 장수가 되어(將而) 한나라의 신성을 공격했다(擊韓之新城). 이 해에(是歲), 양후가(穰侯) 진나라에서 재상 노릇하면서(相秦), 임비를 등용하여(舉任鄙以) 한중을 지키도록 했다(爲漢中守).

그다음 해에(其明年), 백기가 좌경이 되어(白起爲左更), 한나라와 위나라를 이윤에서 공격하고(攻韓、魏於伊闕), 24만 명의 머리를 베고(斬首二十四萬), 또(又) 그 장수 공손희를 사로잡아서(虜其將公孫喜), 5개 성을 함락시켰다(拔五城). 백기가(起) 벼슬이 바뀌어(遷) 국위가 되었다(爲國尉). 하수를 건너(涉河) 한나라 안읍을 취하고(取韓安邑以) 동으로 가서(東), 건하에 이르렀다(到乾河).

다음 해에(明年), 백기가 대량조가 되었다(白起爲大良造). 위나라를 공격해서(攻魏), 무찌르고(拔之), 크고 작은 성 61개를 빼앗았다(取城小大六十一).

이듬해에(明年), 백기가(起) 객경인 사마조와 함께(與客卿錯) 환성을 공격해서(攻垣城), 함락시켰다(拔之). 5년 후에(後五年), 백기가 조나라를 공격해서(白起攻)趙, 광랑성을 빼앗았다(拔光狼城). 7년 후에(後七年), 백기가(白起) 초나라를 공격해서(攻楚), 언과 등의 5개 성을 빼앗았다(拔鄢、鄧五城).

그 이듬해에(其明年), 초나라를 공격해서(攻楚), 영을 점령하고(拔郢), 이릉을 불태우고(燒夷陵), 마침내(遂) 동으로 경릉에 이르렀다(東至竟陵). 초왕이(楚王) 영을 버리고(亡去郢), 동으로 달아나(東走) 진으로 <수도를> 옮겼다(徙陳). 진나라가(秦) 영을 남군으로 삼았다(以郢爲南郡). 백기가(白起) 벼슬이 바뀌어(遷) 무안군이 되었다(爲武安君). 무안군은(武安君) 초나라를 취하고(因取楚), 무군과 검중군을 평정했다(定巫、黔中郡).

소왕 34년에(昭王三十四年), 백기가 위나라를 공격해서(白起攻魏), 화양을 함락시키고(拔華陽), 망묘를 도망하게 했으며(走芒卯, 而) 삼진의 장수를 포로로 잡고(虜三晉將), 13만 명의 머리를 베었다(斬首十三萬). 조나라 장수 가언과 싸워(與趙將賈偃戰), 그 병졸 2만 명을 하수에 빠뜨려 죽였다(沈其卒二萬人於河中). 소왕 43년에(昭王四十三年), 백기가(白起) 한나라 형성을 쳐서(攻韓陘城), 성 다섯 개를 빼앗고(拔五城), 5만 명의 목을 베었다( 斬首五萬). 44년(四十四年), 백기가(白起) 남양을 공격해서(攻南陽) 태행산의 길이(太行道), 끊어졌다(絕之). 


2 四十五年, 伐韓之野王. 野王降秦, 上黨道絕. 其守馮亭與民謀曰: "鄭道已絕, 韓必不可得爲民. 秦兵日進, 韓不能應, 不如以上黨歸趙. 趙若受我, 秦怒, 必攻趙. 趙被兵, 必親韓. 韓趙爲一, 則可以當秦." 因使人報趙. 趙孝成王與平陽君、平原君計之. 平陽君曰: "不如勿受. 受之, 禍大於所得." 平原君曰: "無故得一郡, 受之便." 趙受之, 因封馮亭爲華陽君. 

2 45년에(四十五年), 한나라의 야왕을 정벌했다(伐韓之野王). 야왕이 진나라에 항복하자( 野王降秦), 상당의 길이 끊어졌다(上黨道絕).

그 태수(其守) 풍정과 백성이 모의하여 말하길(馮亭與民謀曰): "정나라의 길이 이미 끊어져서(鄭道已絕), 한나라가(韓) 반드시(必) 백성을 위할 수 없을 것이다(不可得爲民). 진나라 군대가(秦兵) 매일 나아가는데(日進), 한나라가(韓) 대응할 수 없으므로(不能應), 상당을 조나라에 돌려주는 것이 낫다(不如以上黨歸趙). 조나라가(趙) 만약(若) 우리를 받아준다면(受我), 진나라가 화를 내서(秦怒), 반드시(必) 조나라를 공격할 것이다(攻趙). 조나라가 침략을 받으면(趙被兵), 반드시(必) 한나라와 가까워질 것이다(親韓). 한나라와 조나라가 하나가 된다면(韓趙爲一, 則) 진나라를 대적할 수 있다(可以當秦)."라고 했다.

사람을 시켜(因使人) 조나라에 보고했다(報趙). 조나라 효성왕과(趙孝成王與) 평양군, 평원군이 의논했다(平陽君、平原君計之).

평양군이 말하길平(陽君曰): "받지 않는 것만 못합니다(不如勿受). 받으면(受之), 화가(禍) 얻은 것보다 클 것입니다(大於所得)."라고 했다.

평원군이 말하길(平原君曰): "까닭 없이(無故) 한 군을 얻으니(得一郡), 받는 것이 좋습니다(受之便)."라고 했다.

조나라가 받고(趙受之), 이어(因) 풍정을 봉하여(封馮亭) 황양군으로 삼았다(爲華陽君). 


3 四十六年, 秦攻韓緱氏、藺, 拔之. 

3 46년에(四十六年), 진나라가(秦) 한나라 구지와 인을 공격해서(攻韓緱氏、藺), 빼앗았다(拔之). 


4 四十七年, 秦使左庶長王龁攻韓, 取上黨. 上黨民走趙. 趙軍長平, 以按據上黨民. 四月, 龁因攻趙. 趙使廉頗將. 趙軍士卒犯秦斥兵, 秦斥兵斬趙裨將茄. 六月, 陷趙軍, 取二鄣四尉. 七月, 趙軍筑壘壁而守之. 秦又攻其壘, 取二尉, 敗其陣, 奪西壘壁. 廉頗堅壁以待秦, 秦數挑戰, 趙兵不出. 趙王數以爲讓. 而秦相應侯又使人行千金於趙爲反閒, 曰: "秦之所惡, 獨畏馬服子趙括將耳, 廉頗易與, 且降矣." 趙王既怒廉頗軍多失亡, 軍數敗, 又反堅壁不敢戰, 而又聞秦反閒之言, 因使趙括代廉頗將以擊秦. 秦聞馬服子將, 乃陰使武安君白起爲上將軍. 而王龁爲尉裨將, 令軍中有敢泄武安君將者斬. 趙括至, 則出兵擊秦軍. 秦軍詳敗而走, 張二奇兵以劫之. 趙軍逐勝, 追造秦壁. 壁堅拒不得入, 而秦奇兵二萬五千人絕趙軍後, 又一軍五千騎絕趙壁閒, 趙軍分而爲二, 糧道絕. 而秦出輕兵擊之. 趙戰不利, 因筑壁堅守, 以待救至. 秦王聞趙食道絕, 王自之河內, 賜民爵各一級, 發年十五以上悉詣長平, 遮絕趙救及糧食. 

4 47년에(四十七年), 진나라가(秦) 좌서장 왕홀을 시켜(使左庶長王龁) 한나라를 공격하고(攻韓), 상당을 취했다(取上黨). 상당의 백성이(上黨民) 조나라로 달아났다(走趙). 조나라 장평에 군대를 주둔시키고((趙軍長平), 以) 상당의 백성을 보호했다(按據上黨民). 4월에(四月), 왕홀이(龁) 조나라를 공격했다(因攻趙). 조나라가(趙) 염파를 장군으로 삼았다(使廉頗將). 조나라(趙) 군대와 사졸이(軍士卒) 진나라 정찰병을 공격했는데(犯秦斥兵), 진나라 청찰병이(秦斥兵) 조나라 비장 가를 죽였다(斬趙裨將茄).

6월에(六月), 조나라 군대를 무너뜨리고(陷趙軍), 보루 2개를 빼앗고 도위 4명을 잡았다(取二鄣四尉). 7월에(七月), 조나라 군대가(趙軍) 보루를 쌓아서(筑壘壁而) 지켰다(守之). 진나라가(秦) 또(又) 그 보루를 공격하여(攻其壘), 도위 2명을 잡고(取二尉), 그 진지를 무너뜨리고(敗其陣), 서쪽 보루를 빼앗았다(奪西壘壁). 염파가(廉頗) <보루를> 견고하게 하고서(堅壁以) 진나라와 대적하자(待秦), 진나라가(秦) 여러 번(數) 싸움을 걸었지만(挑戰), 조나라 군대가 나오지 않았다(趙兵不出). 조왕이(趙王) 여러 번(數) <싸우지 않는 것을> 꾸짖었다(以爲讓).

그러나(而) 진나라 재상 응후가(秦相應侯) 또(又) 사람을 시켜(使人) 조나라에 천금을 뿌리고(行千金於趙) 이간질을 시도했다(爲反閒), 말하길(曰): "진나라가 싫어하는 것은(秦之所惡), 오직(獨) 마복자가 조나라의 총대장이 되는 것을 두려워할 뿐이니(畏馬服子趙括將耳), 염파는 상대하기에 쉽고(廉頗易與), 또(且) 항복할 것이다(降矣)."라고 했다.

조왕이(趙王) 이미(既) 염파의 군사가 죽거나 도망간 사람이 많고(廉頗軍多失亡), 군대가 여러 번 패했는데도(軍數敗), 또(又) 도리어(反) 견고하게 하며 싸우지 않는 것에(堅壁不敢戰) 화가 났고(, 而) 또(又) 진나라의 이간질하는 말을 듣자(聞秦反閒之言), 조괄을 시켜(因使趙括) 염파를 대신하여 장수로 삼아(代廉頗將以) 진나라를 공격했다(擊秦). 진나라는(秦) 마복자가 장수가 된 것을 듣고(聞馬服子將), 이에(乃) 은밀하게(陰) 무안군 백기를 상장군으로 삼고(使武安君白起爲上將軍, 而) 왕홀을(王龁) 위비장으로 삼고(爲尉裨將), 군중에 명령을 내려(令軍中) 무안군이 장수가 된 것을(武安君將) 감히 누설하는 사람이 있으면(有敢泄者) 참수하겠다고 했다(斬). 조괄이 이르자(趙括至, 則) 군대를 내어(出兵) 진나라 군대를 공격했다(擊秦軍). 진나라 군사가(秦軍) 거짓으로 패하여 도주하며(詳敗而走), 두 갈래 복병을 내보내(張二奇兵以) 위협하려고 헸다(劫之). 진나라 군대가(趙軍) 승세를 쫓아(逐勝), 추격하여(追) 진나라 보루에 이루렀다(造秦壁). 보루가 견고하고 튼튼해서(壁堅拒) 들어갈 수 없었는데(不得入, 而) 진나라 복병(秦奇兵) 2만 5000명이(二萬五千人) 조나라 군대의 뒤를 끊고(絕趙軍後), 또(又) 한 부대(一軍) 5천 명의 기병이(五千騎) 조나라 보루 사이를 끊으니(絕趙壁閒), 조나라 군대가 나뉘어(趙軍分而) 둘이 되었고(爲二), 식량 보급로가 끊어졌다(糧道絕). 그러자(而) 잔나라(秦) 날랜 기병을 보내(出輕兵) 공격했다(擊之). 조나라는(趙) 전투가 불리하자(戰不利), 이에(因) 보루를 지어(筑壁) 견고하게 지키고(堅守, 以) 구원군이 오기를 기다렸다(待救至). 진나라 왕이(秦王) 조나라의 보급로가 끊겼다는 것을 듣고(聞趙食道絕), 왕이(王) 직접(自) 하내로 가서(之河內), 백성에게(民) 작위를 각 1계급씩(爵各一級) 내리고(賜), 나이 15세 이상을 뽑아(發年十五以上) 모두(悉) 장평으로 보내서(詣長平), 조나라 군대와 식량을 오지 못하도록 막았다(遮絕趙救及糧食). 


5 至九月, 趙卒不得食四十六日, 皆內陰相殺食. 來攻秦壘, 欲出. 爲四隊, 四五復之, 不能出. 其將軍趙括出銳卒自搏戰, 秦軍射殺趙括. 括軍敗, 卒四十萬人降武安君. 武安君計曰: "前秦已拔上黨, 上黨民不樂爲秦而歸趙. 趙卒反覆. 非盡殺之, 恐爲亂." 乃挾詐而盡阬殺之, 遺其小者二百四十人歸趙. 前後斬首虜四十五萬人. 趙人大震. 

5 9월에 이르자(至九月), 조나라 군사들이(趙卒) 식량을 얻지 못한 것이(不得食) 46일이 되었고(四十六日), 모두(皆)( 안에서(內) 은밀히(陰) 서로 죽여 잡아먹었다(相殺食). 진나라라 보루를 공격해서(來攻秦壘), 나가려고 했다(欲出). 4개 부대를 만들어(爲四隊), 4~5번 반복했지만(四五復之), 나갈 수 없었다(不能出). 그 장군 조괄이(其將軍趙括) 정예병을 내보내고(出銳卒) 직접(自) 전투에 참가했으나(搏戰), 진나라 군사의 활이(秦軍射) 조괄을 죽였다(殺趙括). 조괄의 군대가 패하고(括軍敗), 병사(卒) 40만 명이 무안군에게 항복했다(四十萬人降武安君).

무안군이 계책을 내서 말하길(武安君計曰): "전에(前) 진나라가(秦) 이미(已) 상당을 빼앗았고(拔上黨), 상당의 백성이(上黨民) 진나라 백성이 되는 것을 기뻐하지 않고(不樂爲秦而) 조나로 돌아갔다(歸趙). 조나라 병사들이(趙卒)  <마음을> 잘 바꾼다(反覆). 모두 죽이지 않으면(非盡殺之), 반란을 일으킬까 염려된다(恐爲亂)."라고 했다.

이에(乃) 속여서(挾詐而) 모두(盡) 땅에 묻어 죽이고(阬殺之), 어린아이 240명만 남겨서(遺其小者二百四十人) 조나라로 돌려보냈다(歸趙). 이때 전후로(前後) 머리를 베이고(斬首) 포로로 잡힌 사람이(虜) 45만 명이었다(四十五萬人). 조나라 사람들이 크게 떨었다(趙人大震). 

 

* 挾詐(협사): (속으로) 간사()한 생각을 가짐.


6 四十八年十月, 秦復定上黨郡. 秦分軍爲二:王龁攻皮牢, 拔之; 司馬梗定太原. 韓、趙恐, 使蘇代厚幣說秦相應侯曰: "武安君禽馬服子乎?" 曰: "然." 又曰: "即圍邯鄲乎?" 曰: "然." 「趙亡則秦王王矣, 武安君爲三公. 武安君所爲秦戰勝攻取者七十餘城, 南定鄢、郢、漢中, 北禽趙括之軍, 雖周、召、呂望之功不益於此矣. 今趙亡, 秦王王, 則武安君必爲三公, 君能爲之下乎?雖無欲爲之下, 固不得已矣. 秦嘗攻韓, 圍邢丘, 困上黨, 上黨之民皆反爲趙, 天下不樂爲秦民之日久矣. 今亡趙, 北地入燕, 東地入齊, 南地入韓、魏, 則君之所得民亡幾何人. 故不如因而割之, 無以爲武安君功也." 於是應侯言於秦王曰: "秦兵勞, 請許韓、趙之割地以和, 且休士卒." 王聽之, 割韓垣雍、趙六城以和. 正月, 皆罷兵. 武安君聞之, 由是與應侯有隙. 

6 48년 10월에(四十八年十月), 진나라가(秦) 다시(復) 상당군을 평정했다(定上黨郡). 진나라가 군대를 나누어(秦分軍) 둘로 만들고(爲二): 왕홀이(王龁) 피뢰를 공격하고(攻皮牢), 함락시키고(拔之); 사마경이(司馬梗) 태원을 평정했다(定太原).

한나라와 조나라가 두려워하며(韓、趙恐), 소대를 시켜(使蘇代) 후한 예물을 주고(厚幣) 진나라 재상 응후를 설득하여 말하길(說秦相應侯曰): "무안군이(武安君) 마복의 아들을 사로잡았습니까(禽馬服子乎)?"라고 했다.

말하길(曰): "그렇다(然)."라고 했다.

또 말하길(又曰): "곧(即) 한단을 포위할까요(圍邯鄲乎)?"라고 했다.

말하길(曰): "그렇다(然)."라고 했다.

"조나라가 망하면(趙亡則) 진왕이 왕노릇하고(秦王王矣), 무안군이 삼공이 될 것입니다(武安君爲三公). 무안군이(武安君) 진나라를 위해(所爲秦) 전쟁에서 이기고(戰勝) 공격해서 빼앗은 성이 70여 개이고(攻取者七十餘城), 남으로(南) 언과 영, 한중을 평정하고(定鄢、郢、漢中), 북으로(北) 조괄의 군대를 사로잡았으니(禽趙括之軍), 비록(雖) 주공과 소공, 여망의 공이라도(周、召、呂望之功) 이것을 넘지 못합니다(不益於此矣). 지금(今) 조나라가 망하고(趙亡), 진왕이 왕노릇 하면(秦王王, 則) 무안군이(武安君) 반드시(必) 삼공이 될 것인데(爲三公), 군은(君) 그 아래 있을 수 있습니까(能爲之下乎)? 비록(雖) 그 아래가 되려고 하지 않더라도(無欲爲之下), 진실로(固) 어쩔 수 없습니다(不得已矣). 진나라가(秦) 일찍이(嘗) 한나라를 쳐서(攻韓), 형구를 포위하고(圍邢丘), 상당을 곤란하게 했지만(困上黨), 상당의 백서이(上黨之民) 모두(皆) 돌아가 조나라 사람이 되었으니(反爲趙), 천하 사람들이(天下) 진나라 백성 되기를 좋아하지 않은 것이(不樂爲秦民之日) 오래되었습니다(久矣). 지금(今) 조나라를 망하게 하면(亡趙), 북쪽 땅은(北地) 연나라에 들어가고(入燕), 동쪽 땅은 제나라에 들어가고(東地入齊), 남쪽 땅은(南地) 한나라와 위나라에 들어간다면(入韓、魏, 則) 그대가(君之) 백성을 얻을 수 있는 것이(所得民) 몇 사람 되지 않습니다(亡幾何人). 그러므로(故) 땅을 떼어 받고(因而割之), 무안군의 공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만(無以爲武安君功也) 못합니다(不如)."라고 했다.

이에 응후가(於是應侯) 진왕에게 말하길(言於秦王曰): "진나라 병사가 피로하니(秦兵勞), 청컨대(請) 한나라와 조나라가(韓、趙之) 땅을 떼어주고(割地以) 화친하는 것을 허락하고(許和), 또(且) 사졸을 쉬도록 하시기 바랍니다(休士卒)."라고 했다.

왕이 그것을 들어주어(王聽之), 한나라의 원옹과 조나라의 6성을 떼어(割韓垣雍、趙六城以) 화친했다(和). 정월에(正月), 모두(皆) 병사를 물렸다(罷兵). 무안군이 이것을 듣고(武安君聞之), 이 때문에(由是) 응후와 틈이 생겼다(與應侯有隙). 


7 其九月, 秦復發兵, 使五大夫王陵攻趙邯鄲. 是時武安君病, 不任行. 四十九年正月, 陵攻邯鄲, 少利, 秦益發兵佐陵. 陵兵亡五校. 武安君病愈, 秦王欲使武安君代陵將. 武安君言曰: "邯鄲實未易攻也. 且諸侯救日至, 彼諸侯怨秦之日久矣. 今秦雖破長平軍, 而秦卒死者過半, 國內空. 遠絕河山而爭人國都, 趙應其內, 諸侯攻其外, 破秦軍必矣. 不可." 秦王自命, 不行; 乃使應侯請之, 武安君終辭不肯行, 遂稱病. 

7 그해 9월에(其九月), 진나라가(秦) 다시 군대를 일으켜(復發兵), 오대부 왕릉으로 하여금(使五大夫王陵) 조나라 한단을 공격하게 했다(攻趙邯鄲). 이때(是時) 무안군이 병이 들어(武安君病), 나갈 수 없었다(不任行). 49년 정월에(四十九年正月), 왕릉이(陵) 한단을 공격해서(攻邯鄲), 조금 유리하자(少利), 진나라가(秦) 더(益) 군대를 일으켜(發兵 왕릉을 도왔다(佐陵). 왕릉이(陵兵) 다섯 장수를 잃었다(亡五校). 무안군의 병이 조금 나아지자(武安君病愈), 진왕이(秦王) 무안군으로 하여금(欲使武安君) 왕릉을 대신하여(代陵) 장수로 삼으려 했다(將).

무안군이 말하길(武安君言曰): "한단은(邯鄲) 실제(實) 쉽게 공격할 수 없습니다(未易攻也). 또(且) 제후의 구원병이(諸侯救) 곧 올 것이니(日至), 저 제후들이(彼諸侯) 진나라를 원망한 것이 오래되었습니다(怨秦之日久矣). 지금(今) 진나라가(秦) 비록(雖) 장평의 군대를 깨뜨리고(破長平軍, 而) 진나라 사졸 중에 죽은 사람이(秦卒死者) 반을 넘었으니(過半), 나라 안이 비었습니다(國內空). 멀리(遠) 산과 물을 넘어(絕河山而) 다른 나라의 도읍에서 싸우니(爭人國都), 조나라가(趙) 안에서 응하고(應其內), 제후들이(諸侯) 그 밖에서 공격하면(攻其外), 진나라 군대가 반드시 무너질 것입니다(破秦軍必矣). 안됩니다(不可)."라고 했다.

진왕이(秦王) 직접 명령했지만(自命), 가지 않았고(不行); 이에(乃) 응후를 시켜 청했지만(使應侯請之), 무안군이(武安君) 끝내 사양호고(終辭) 기꺼이 가려하지 않고(不肯行), 마침내(遂) 병을 핑계 삼았다(稱病). 


8 秦王使王龁代陵將, 八九月圍邯鄲, 不能拔. 楚使春申君及魏公子將兵數十萬攻秦軍, 秦軍多失亡. 武安君言曰: "秦不聽臣計, 今如何矣!" 秦王聞之, 怒, 彊起武安君, 武安君遂稱病甐. 應侯請之, 不起. 於是免武安君爲士伍, 遷之陰密. 武安君病, 未能行. 居三月, 諸侯攻秦軍急, 秦軍數卻, 使者日至. 秦王乃使人遣白起, 不得留咸陽中. 武安君既行, 出咸陽西門十里, 至杜郵. 秦昭王與應侯群臣議曰: "白起之遷, 其意尚怏怏不服, 有餘言." 秦王乃使使者賜之劍, 自裁. 武安君引劍將自剄, 曰: "我何罪于天而至此哉?" 良久, 曰: "我固當死. 長平之戰, 趙卒降者數十萬人, 我詐而盡阬之, 是足以死." 遂自殺. 武安君之死也, 以秦昭王五十年十一月. 死而非其罪, 秦人憐之, 鄉邑皆祭祀焉. 

8 진왕이(秦王) 왕홀을 시켜(使王龁) 왕릉을 대신해(代陵) 장수로 삼고(將), 8~9월에(八九月) 한단을 포위했는데(圍邯鄲), 함락시킬 수 없었다(不能拔). 초나라가(楚) 춘신군과(使春申君及) 위공자를(魏公子) 장수로 삼아(將) 병수 수십 만이(兵數十萬) 진나라 군대를 공격하니(攻秦軍), 진나라 군대가(秦軍) 죽고 도망친 사람이 많았다(多失亡).

무안군이 말하길(武安君言曰): "진왕이(秦) 나의 계책을 듣지 않았는데(不臣計), 지금(今) 어떠한가(如何矣)!"라고 했다.

진왕이 그것을 듣고(秦王聞之), 분노하여(怒), 억지로(彊) 무안군을 일으키려고 했지만(起武安君), 무안군이(武安君) 끝내(遂) 병을 핑계로 움직이지 않았다(稱病甐). 응후가 청했지만(應侯請之), 움직이지 않았다(不起). 이에(於是) 무안군을 면직시키고(免武安君) 병졸로 만들어(爲士伍), 그를 음밀로 옮겼다(遷之陰密). 무안군이 병이 들어(武安君病), 갈 수 없었다(未能行). 석 달이 지나서(居三月), 제후들이(諸侯) 진나라 군대를 급습하자(攻秦軍急), 진나라 군대가(秦軍) 여러 번 물러났고(數卻), <위급함을 알리는> 사자가(使者) 날마다 이르렀다(日至). 진왕이 이에(秦王乃) 사람을 시켜(使人) 백기에게 보내(遣白起), 함양 안에 머물지 못하도록 했다(不得留咸陽中). 무안군이(武安君) 이미 길을 떠나(既行), 함양 서문을 나서(出咸陽西門) 10리를 가서(十里), 두우에 이르렀다(至杜郵). 진 소왕이(秦昭王) 응후와 다른 신하와 함께 의논하여 말하길(與應侯群臣議曰): "백기가 옮기면서(白起之遷), 그 뜻은(其意) 오히려(尚) 앙심을 품고(怏怏) 불복하며(不服), 남긴 말이 있다(有餘言)."라고 했다.

진왕이(秦王) 이에(乃) 사자를 시켜(使使者) 그에게 검을 내려서(賜之劍),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했다(自裁). 무안군이(武安君) 검을 끌어당겨(引劍) 목을 찌르려 하면서 말하길(將自剄, 曰): "내가(我) 하늘에 무슨 죄가 있어(何罪于天而) 이런 지경에 이르렀는가(至此哉)?"라고 했다. 한참이 지나 말하길(良久, 曰): "내가(我) 진실로(固) 마땅히 죽어야 한다(當死). 장평의 싸움에서(長平之戰), 조나라 사졸이 항복한 사람이(趙卒降者) 수십만인데(數十萬人), 내가 속여서(我詐而) 모두 묻어 죽였으니(盡阬之), 이것은(是) 죽기에 충분하다(足以死)."라고 했다. 마침내(遂) 자살했다(自殺). 무안군이 죽은 것이(武安君之死也), 진 소왕 55년 11월이다(以秦昭王五十年十一月). 죽었지만(死而) 죄를 지은 것이 아니어서(非其罪), 진나라 사람들이(秦人) 그를 가엾게 여겨(憐之), 마을마다(鄉邑) 모두(皆) 제사를 지냈다(祭祀焉). 

 

* 怏怏(앙앙): 마음에 섭섭하거나 시뻐서 앙심()을 품은 모양().

* 自裁(자재): 스스로 자기()의 목숨을 끊음.

* 良久(양구): 꽤 오래, 한참 지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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