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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史記)/사기열전(史記列傳)

[史記列傳(사기열전) 78 춘신군열전(春申君列傳) 2/3] 춘신지명 태자출관(春信之明 太子出關) / 춘신군의 지혜로 태자를 돌려보내다

by प्रज्ञा 2024. 4.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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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黃歇受約歸楚, 楚使歇與太子完入質於秦, 秦留之數年. 楚頃襄王病, 太子不得歸. 而楚太子與秦相應侯善, 於是黃歇乃說應侯曰: "相國誠善楚太子乎?" 應侯曰: "然." 歇曰: "今楚王恐不起疾, 秦不如歸其太子. 太子得立, 其事秦必重而德相國無窮, 是親與國而得儲萬乘也. 若不歸, 則咸陽一布衣耳; 楚更立太子, 必不事秦. 夫失與國而絕萬乘之和, 非計也. 願相國孰慮之." 應侯以聞秦王. 秦王曰: "令楚太子之傅先往問楚王之疾, 返而後圖之." 黃歇爲楚太子計曰: "秦之留太子也, 欲以求利也. 今太子力未能有以利秦也, 歇憂之甚. 而陽文君子二人在中, 王若卒大命, 太子不在, 陽文君子必立爲後, 太子不得奉宗廟矣. 不如亡秦, 與使者俱出; 臣請止, 以死當之." 楚太子因變衣服爲楚使者御以出關, 而黃歇守舍, 常爲謝病. 度太子已遠, 秦不能追, 歇乃自言秦昭王曰: "楚太子已歸, 出遠矣. 歇當死, 願賜死." 昭王大怒, 欲聽其自殺也. 應侯曰: "歇爲人臣, 出身以徇其主, 太子立, 必用歇, 故不如無罪而歸之, 以親楚." 秦因遣黃歇. 

9 황헐이(黃歇) 약속을 받고(受約) 초나라로 돌아왔고(歸楚), 초나라는(楚) 황헐과 태자 완으로 하여금(使歇與太子完) 진나라에 인질로 가도록 해서(入質於秦), 진나라가(秦) 몇 년 동안 붙잡아 두었다(留之數年). 초나라 경양와이 병이 들었는데(楚頃襄王病), 태자가 돌아가지 못했다(太子不得歸). 그러나(而) 초나라 태자가(楚太子) 진나라 재상 응후와(與秦相應侯) 사이가 좋았고(善), 이에(於是) 황헐이(黃歇乃) 응후를 설득해서 말하길(說應侯曰):

"상국께서(相國) 참으로(誠) 초나라 태자와 잘 지냅니까(善楚太子乎)?"라고 했다.

응후가 말하길(應侯曰): "그렇다(然)."라고 했다.

황헐이 말하길(歇曰): "지금(今) 초나라 왕이 병이 들어(楚王恐) 일어나기 어렵고(不起疾), 진나라가(秦) 그 태자를 돌려보내는 것만 못합니다(不如歸其太子). 태자가 즉위하면(太子得立), 그가(其) 진나라를 섬기는 것이(事秦) 반드시(必) 무거울 것이고(重而) 상국에게 끝없이 고마워할 것이니(德相國無窮), 이것은(是) 동맹국과 친하게 지내고(親與國而) 만승의 나라를 <동맹국으로> 마련하는 것입니다(得儲萬乘也). 만약(若) 돌아가지 못한다면(不歸, 則) 함양의(咸陽) 한 백성일뿐이고(一布衣耳); 초나라가(楚) 다시(更) 태자를 세우면(立太子), 반드시(必) 진나라를 섬기지 않을 것입니다(不事秦). 무릇(夫) 동맹국을 잃고(失與國而) 만승의 나라와 화친이 끊어지니(絕萬乘之和), <좋은> 계략이 아닙니다(非計也). 원컨대(願) 상국께서(相國) 깊이 생각하기 바랍니다(孰慮之)."라고 했다.

응후가(應侯) 이것을(以) 진왕에게 보고했다(聞秦王). 진왕이 말하길(秦王曰):

"초나라 태자의 스승으로 하여금(令楚太子之傅) 먼저 가서(先往) 초왕의 병을 문안하고(問楚王之疾), 돌아온 뒤에(返而後) 생각하도록 하자(圖之)."라고 했다.

황헐이(黃歇) 초나라 태자를 위해(爲楚太子) 계획을 내어 말하길(計曰): "진나라가(秦之) 태자를 잡아둔 것은(留太子也), 이익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欲以求利也). 지금(今) 태자의 힘이(太子力) 진나라에 이익을 줄 수 있는 것이 없으니(未能有以利秦也), 저는 그것이 매우 걱정됩니다(歇憂之甚). 그리고(而) 양문군의 두 아들이(陽文君子二人) 초나라에 있으니(在中), 왕께서 만약(王若) 돌아가시면(卒大命), 태자가 있지 않으므로(太子不在), 양문군의 아들이(陽文君子) 반드시 즉위해서(必立) 뒤를 이을 것이고(爲後), 태자는(太子) 종묘를 받들 수 없습니다(不得奉宗廟矣). 진나라에서 도망가는 것만 못하니(不如亡秦), 사자와 함께(與使者) 모두 나가고(俱)出; 신은(臣) 청컨대 머물러서(請止), 죽음으로써(以死) 그것을 감당할 것입니다(當之)."라고 했다.

초나라 태자가(楚太子) 이에(因) 옷을 갈아입고(變衣服) 초나라 사자의 마부가 되어(爲楚使者御以) 관을 나서고(出關, 而) 황헐이 집을 지키고서(黃歇守舍), 늘(常) 병을 핑계 대었다(爲謝病). 태자가 이미 멀리 갔음을(太子已遠) 헤아려(度), 진나라가 쫓을 수 없게 되자(秦不能追), 황헐이(歇乃) 스스로 진 소왕에게 말하길(自言秦昭王曰):

"초나라 태자가(楚太子) 이미 돌아가서(已歸), 멀리 갔습니다(出遠矣). 제가 죽음을 맞을 것이니(歇當死), 원컨대 죽기를 바랍니다(願賜死)."라고 했다.

소왕이 크게 노하여(昭王大怒), 그가 자결하려는 것을 들어주었다(欲聽其自殺也).

응후가 말하길(應侯曰): "황헐은(歇) 신하 된 사람이니(爲人臣), 몸을 내던져(出身以) 자기 주인을 따라 죽으려 하는데(徇其主), 태자가 즉위하면(太子立), 반드시(必) 황헐을 등용할 것이고(用歇), 그러므로(故) 죄를 묻지 않고 돌아가도록 해서(無罪而歸之, 以) 초나라와 친하게 지내는 것만(親楚) 못합니다(不如)."라고 했다.

진나라가(秦) 이에(因) 황헐을 돌려보냈다(遣黃歇). 


10 歇至楚三月, 楚頃襄王卒, 太子完立, 是爲考烈王. 考烈王元年, 以黃歇爲相, 封爲春申君, 賜淮北地十二縣. 後十五歲, 黃歇言之楚王曰: "淮北地邊齊, 其事急, 請以爲郡便." 因并獻淮北十二縣, 請封於江東. 考烈王許之. 春申君因城故吳墟, 以自爲都邑. 

10 황헐이(歇) 초나라에 도착하고(至楚) 3개월이 지나(三月), 초나라 경양왕이 죽고(楚頃襄王卒), 태자 완이 즉위하니(太子完立), 이 사람이(是) 고열왕이다(爲考烈王). 고열왕 원년에(考烈王元年), 황헐을 재상으로 삼고(以黃歇爲相), 춘신군으로 봉하고(封爲春申君), 회북의 땅 20개 현을 주었다(賜淮北地十二縣).

15년 뒤에(後十五歲), 황헐이(黃歇) 초나라 왕에게 말하길(言之楚王曰): "회수 북쪽땅은(淮北地) 제나라와 국경을 이루고(邊齊), 그 일이 급하니(其事急), 청컨대(請) 군으로 삼으면(以爲郡) 편합니다(便)."라고 했다.

이에(因) 회북의 20개 현을 모두 바치고(并獻淮北十二縣), 강동에 봉해주기를 청했다(請封於江東). 고열왕이 허락했다(考烈王許之). 춘신군이(春申君) 이에(因) 옛 오나라 성터에 성을 쌓고(城故吳墟, 以) 스스로(自) 도읍으로 삼았다(爲都邑).


11 春申君既相楚, 是時齊有孟嘗君, 趙有平原君, 魏有信陵君, 方爭下士, 招致賓客, 以相傾奪, 輔國持權. 

11 춘신군이(春申君) 이미 초나라 재상이 되었을 때(既相楚), 이때(是時) 제나라에(齊) 맹상군이 있었고(有孟嘗君), 조나라에(趙) 평원군이 있고(有平原君), 위나라에(魏) 신릉군이 있어(有信陵君), 바야흐로(方) 다투어(爭) 선비에게 낮추고(下士), 빈객을 모아(招致賓客, 以) 서로 빼앗아(相傾奪), 나라를 돕고(輔國) 권력을 유지했다(持權). 


12 春申君爲楚相四年, 秦破趙之長平軍四十餘萬. 五年, 圍邯鄲. 邯鄲告急於楚, 楚使春申君將兵往救之, 秦兵亦去, 春申君歸. 春申君相楚八年, 爲楚北伐滅魯, 以荀卿爲蘭陵令. 當是時, 楚復彊. 

12 춘신군이(春申君) 초나라의 재상이 되어(爲楚相) 4년이 지나고(四年), 진나라가(秦) 조나라 장평에서(趙之長平) 군사 40만 명을 깨뜨렸다(軍四十餘萬). 5년이 지나(五年), 한단이 포위되었다(圍邯鄲). 한단에서(邯鄲) 초나라에 위급함을 알리자(告急於楚), 초나라 춘신군이(楚使春申君) 병사를 이끌고 가서(將兵往) 구해주었고(救之), 진나라 군대도 또한 물러나서(秦兵亦去), 춘신군이 돌아왔다(春申君歸). 춘신군이(春申君) 초나라에서 재상을 하고(相楚) 8년이 지나(八年), 초나라를 위해(爲楚) 북쪽으로(北) 노나라를 쳐서 멸망시키고(伐滅魯), 순경을(以荀卿) 난릉령으로 삼았다(爲蘭陵令). 이때에(當是時), 초나라가(楚) 강함을 회복했다(復彊). 


13 趙平原君使人於春申君, 春申君捨之於上舍. 趙使欲夸楚, 爲瑁簪, 刀劍室以珠玉飾之, 請命春申君客. 春申君客三千餘人, 其上客皆躡珠履以見趙使, 趙使大慚. 

13 조나라 평원군이(趙平原君) 춘신군에게 사람을 보내고(使人於春申君), 춘신군이(春申君) 상사에 머물도록 했다(捨之於上舍). 조나라 사신이(趙使) 초나라에 자랑하려고(欲夸楚), 바다거북으로 만든 비녀를 하고(爲瑁簪), 주옥으로 장식한 칼집을 차고(刀劍室以珠玉飾之), 춘신군의 객을 만나기를 청했다(請命春申君客). 춘신군의 빈객이(春申君客) 3천여 명인데(三千餘人), 그중(其) 상객이 모두(上客皆) 주옥으로 꾸민 신을 신고(躡珠履以) 조나라 사신을 만나자(見趙使), 조나라 사신이(趙使) 크게 부끄러워했다(大慚). 

 

* 刀劍室(도검실): 칼집.


14 春申君相十四年, 秦莊襄王立, 以呂不韋爲相, 封爲文信侯. 取東周. 

14 춘신군이(春申君) 재상이 되고(相) 14년이 지나(十四年), 진 장왕이 즉위하고(秦莊襄王立, 以) 여불위가 재상이 되어(呂不韋爲相), 문신후에 봉해졌다(封爲文信侯). 동주를 빼앗았다(取東周). 


15 春申君相二十二年, 諸侯患秦攻伐無已時, 乃相與合從, 西伐秦, 而楚王爲從長, 春申君用事. 至函谷關, 秦出兵攻, 諸侯兵皆敗走. 楚考烈王以咎春申君, 春申君以此益疏. 

15 춘신군이 재상이 되고(春申君相) 22년이 지나(二十二年), 제후들이(諸侯) 진나라가 공격하는 것이(秦攻伐) 끊임 없는 것을 걱정했고(無已時), 이에(乃) 서로 합족하기로 하고(相與合從), 서쪽으로(西) 진나라를 쳤는데(伐秦, 而) 초왕이 합종의 장이 되고(楚王爲從長), 춘신군이 일을 처리했다(春申君用事). 함곡관에 이르러(至函谷關), 진나라 군대가 나와 공격하니(秦出兵攻), 제후의 군대가(諸侯兵) 모두(皆) 패하여 달아났다(敗走). 초나라 고열왕이(楚考烈王) 이것으로(以) 춘신군을 질책하니(咎春申君), 춘신군이(春申君) 이것 때문에(以此) 더욱 멀어졌다(益疏). 


16 客有觀津人朱英, 謂春申君曰: "人皆以楚爲彊而君用之弱, 其於英不然. 先君時善秦二十年而不攻楚, 何也? 秦踰黽隘之塞而攻楚, 不便; 假道於兩周, 背韓、魏而攻楚, 不可. 今則不然, 魏旦暮亡, 不能愛許、鄢陵, 其許魏割以與秦. 秦兵去陳百六十里, 臣之所觀者, 見秦、楚之日斗也." 楚於是去陳徙壽春; 而秦徙衛野王, 作置東郡. 春申君由此就封於吳, 行相事. 

16 빈객 가운데(客) 관진의 주영이라는 사람이 있어(有觀津人朱英), 춘신군에게 말하길(謂春申君曰):

"사람들은(人) 모두(皆) 초나라가 강했는데(楚爲彊而) 군이 다스려서 약해졌다고(君用之弱) 여기는데(以), 그것이(其) 저에게는(於英) 그렇지 않습니다(不然). 선왕의 시절에(先君時) 진나라와 20년을 잘 지냈고(善秦二十年而) 초나라를 공격하지 않은 것은(不攻楚), 어째서인가요(何也)? 진나라가(秦) 맹애의 요새를 넘어(踰黽隘之塞) 초나라를 공격하는 것이(而攻楚), 불편하고(不便); 두 주나라에게 길을 빌리고(假道於兩周), 한나라와 위나라를 등지고(背韓、魏而) 초나라를 치는 것은(攻楚), 불가능합니다(不可). 지금은(今則) 그렇지 않으니(不然), 위나라가(魏) 금방(旦暮) 망할 것이니(亡), 허와 언릉을 아까워할 수 없고(不能愛許、鄢陵), 위나라 땅을 갈라(其魏割以) 진나라에 주는 것을(與秦) 허용할 것입니다(許). 진나라 군대가(秦兵) 진과의 거리가(去陳) 160리가 될 것이고(百六十里), 신이 보기에(臣之所觀者), 진나라와 초나라는 매일 싸울 것입니다(見秦、楚之日斗也)."라고 했다.

초나라가(楚) 이에(於是) 진을 버리고(去陳) 수춘으로 옮겼고(徙壽春); 그리고(而) 진나라가(秦) 위나라를 야왕으로 옮기고(徙衛野王), 동군을 두었다(作置東郡). 춘신군이(春申君) 이것 때문에(由此) 오에 봉해져 가서(就封於吳), 재상의 일을 행했다(行相事). 

 

* 旦暮(단모): 아침과 저녁을 아울러 이르는 말, 어떤 시기()가 절박(切迫)한 상태(). 또는 목숨이 얼마 남지 않은 것.

* 日斗(일투): 날마다 싸움. 斗는 싸울 ‘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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