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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史記)/사기열전(史記列傳)

[史記列傳(사기열전) 79 범저채택열저(范睢蔡澤列傳) 1/6] 누란지위(累卵之危) / 치욕을 참으며 살아남은 범저

by प्रज्ञा 2024. 4.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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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范睢者, 魏人也, 字叔. 游說諸侯, 欲事魏王, 家貧無以自資, 乃先事魏中大夫須賈. 

1 범저는(范睢者), 위나라 사람이고(魏人也), 자는 숙이다(字叔). 제후에게 유세하고(游說諸侯), 위왕을 섬기려고 했지만(欲事魏王), 집안이 가난해서(家貧) 스스로 경비를 마련하지 못하고(無以自資), 이에(乃) 먼저(先) 위나라 중대부인 수고를 섬겼다(事魏中大夫須賈). 


2 須賈爲魏昭王使於齊, 范睢從. 留數月, 未得報. 齊襄王聞睢辯口, 乃使人賜睢金十斤及牛酒, 睢辭謝不敢受. 須賈知之, 大怒, 以爲睢持魏國陰事告齊, 故得此饋, 令睢受其牛酒, 還其金. 既歸, 心怒睢, 以告魏相. 魏相, 魏之諸公子, 曰魏齊. 魏齊大怒, 使舍人笞擊睢, 折脅摺齒. 睢詳死, 即卷以簀, 置廁中. 賓客飲者醉, 更溺睢, 故僇辱以懲後, 令無妄言者. 睢從簀中謂守者曰: "公能出我, 我必厚謝公." 守者乃請出棄簀中死人. 魏齊醉, 曰: "可矣." 范睢得出. 後魏齊悔, 復召求之. 魏人鄭安平聞之, 乃遂操范睢亡, 伏匿, 更名姓曰張祿. 

2 수고가(須賈) 위왕을 위해(爲魏昭王) 제 나라에 사신으로 갔는데(使於齊), 범저가 따라갔다(范睢從). 몇 달을 머물렀지만(留數月), <등용> 통보를 받지 못했다(未得報). 제 양왕이(齊襄王) 범저의 말재주를 듣고(聞睢辯口), 이에(乃) 사람을 시켜(使人) 범저에게 금 10근과 쇠고기, 술을 보냈지만(賜睢金十斤及牛酒), 범저가 사양하고(睢辭謝) 감히 받지 않았다(不敢受). 수고가 이것을 알고(須賈知之), 크게 노하여(大怒), 범저가(睢) 위나라의 은밀한 일을 가지고(持魏國陰事) 제나라에 보고하고(告齊), 그러므로(故) 이런 선물을 얻었다고(得此饋) 여겨서(以爲), 범저를 시켜(令睢) 그 쇠고기와 술을 받도록 하고(其牛酒), 금을 돌려보냈다(還其金). 돌아와서는(既歸), 마음속으로(心) 범저에게 노여움을 품고(怒睢, 以) 위나라 재상에게 고했다(告魏相). 위나라 재상은(魏相), 위나라의 여러 공자 중 한 사람으로(魏之諸公子), 위제라고 했다(曰魏齊). 위제가 매우 화를 내면서(魏齊大怒), 심부름꾼을 시켜(使舍人) 범저에게 매질하게 해서(笞擊睢), 갈비뼈가 나가고(折脅) 이빨이 부러졌다(摺齒). 범저가(睢) 거짓으로 죽은 척하자(詳死), 곧(即) 대자리로 말아서(卷以簀), 변소 가운데 버렸다(置廁中). 빈객 가운데(賓客) 술을 마신 사람들이(飲者) 취해서(醉), 번갈아(更) 범저에게 오줌을 누었고(溺睢), 그러므로(故) 치욕을 주어(僇辱以) 뒤에 경계로 삼게 해서(懲後), 망령된 말을 하는 사람이 없도록 하려고 했다(令無妄言者).

범저가(睢) 대자리 가운데서(從簀中) 지키는 사람에게 말하길(謂守者曰): "공이(公) 나를 꺼내줄 수 있다면(能出我), 내가(我) 반드시(必) 공에게 두터이 사례하겠다(厚謝公)."라고 했다.

지키는 사람이(守者) 이에(乃) 대자리 안의 죽은 사람을(簀中死人) 내다 버리겠다고 청했다(請出棄).

위제가 취해서(魏齊醉), 말하길(曰): "그렇게 하라(可矣)."라고 했다.

범저가 탈출했다(范睢得出). 나중에(後) 위제가 후회하고(魏齊悔), 다시(復) 그를 찾도록 했다(召求之). 위나라 사람(魏人) 정안평이(鄭安平) 그것을 듣고(聞之), 마침내(乃遂) 범저를 데리고(操范睢) 도망가서(亡), 숨어서(伏匿), 이름과 성을 고쳐(更名姓) 장록이라 했다(曰張祿). 

 

* 辯口(변구): 말을 잘하는 재주.

* 懲後(징후): 오늘날의 잘못을 징계하여 뒷날의 사람들을 경계함.


3 當此時, 秦昭王使謁者王稽於魏. 鄭安平詐爲卒, 侍王稽. 王稽問: "魏有賢人可與俱西游者乎?" 鄭安平曰: "臣里中有張祿先生, 欲見君, 言天下事. 其人有仇, 不敢晝見." 王稽曰: "夜與俱來." 鄭安平夜與張祿見王稽. 語未究, 王稽知范睢賢, 謂曰: "先生待我於三亭之南." 與私約而去. 

3 이 무렵(當此時), 진 소왕이(秦昭王) 알자 왕계를(謁者王稽) 위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使於魏). 정안평이(鄭安平) <신분을> 속이고(詐) 병졸이 되어(爲卒), 왕계를 모셨다(侍王稽).

왕계가 묻기를(王稽問): "위나라에(魏) 함께(與俱) 서쪽으로 유세를 갈 만한(西游) 현인이 있는가(有賢人者乎)?"라고 했다.

정안평이 말하길(鄭安平曰): "신의 마을에(臣里中) 장록선생이 있어(有張祿先生), 군을 뵙기를 원하는데(欲見君), 천하의 일을 말하려고 합니다(言天下事). 그 사람에게(其人) 원수가 있어(有仇), 감히 낮에 뵐 수 없습니다(不敢晝見)."라고 했다.

왕계가 말하길(王稽曰): "밤에(夜) 함께 오시오(與俱來)."라고 했다.

정안평이(鄭安平) 밤에(夜) 장록과 함께(與張祿) 왕계를 만났다(見王稽). 말이(語) 끝나기 전에(未究), 왕계는(王稽) 범수가 현명한 것을 알았고(知范睢賢), 말하길(謂曰): "선생은(先生) 삼정 남쪽에서(於三亭之南) 나를 기다리시오(待我)."라고 했다. 은밀하게 약속하고(與私約而) 떠났다(去). 

 

* 語未究(어미구) : 말이 끝나기 전에. 究는 끝이라는 뜻이다. 


4 王稽辭魏去, 過載范睢入秦. 至湖, 望見車騎從西來. 范睢曰: "彼來者爲誰?" 王稽曰: "秦相穰侯東行縣邑." 范睢曰: "吾聞穰侯專秦權, 惡內諸侯客, 此恐辱我, 我寧且匿車中." 有頃, 穰侯果至, 勞王稽, 因立車而語曰: "關東有何變?" 曰: "無有." 又謂王稽曰: "謁君得無與諸侯客子俱來乎? 無益, 徒亂人國耳." 王稽曰: "不敢." 即別去. 范睢曰: "吾聞穰侯智士也, 其見事遲, 鄉者疑車中有人, 忘索之." 於是范睢下車走, 曰: "此必悔之." 行十餘里, 果使騎還索車中, 無客, 乃已. 王稽遂與范睢入咸陽. 

4 왕계가(王稽) 인사하고(辭) 위나라를 떠나서(魏去), 지나는 길에(過) 범저를 태우고(載范睢) 진나라에 들어갔다(入秦). 호관에 이르러(至湖), 멀리서(望) 전차와 기병이(車騎) 서쪽을 따라오는 것이(從西來) 보였다(見).

범저가 말하길(范睢曰): "저기 오는 사람은(彼來者) 누구입니까(爲誰)?"라고 했다.

왕계가 말하길(王稽曰): "진나라 재상(秦相) 양후가(穰侯) 동쪽(東) 현읍으로 가는 것이다(行縣邑)."라고 했다.

범저가 말하길(范睢曰): "내가 듣기로(吾聞) 양후가(穰侯) 진나라의 권력을 휘두르며(專秦權), 나라 안에(內) 제후의 빈객이 오는 것을(諸侯客) 싫어한다고(惡) 하니, 이것은(此) 나를 욕보일까 걱정되니(恐辱我), 내가 차라리(我寧) 잠시(且) 수레 안에 숨겠습니다(匿車中)."라고 했다.

얼마 되지 않아(有頃), 양후가 과연 도착해서(穰侯果至), 왕계를 위로하고(勞王稽), 이어(因) 마차를 세우고 말하길(立車而語曰): "관동에(關東) 어떤 변화가 있는가(有何變)?"라고 했다.

<왕계가> 말하길(曰): "없습니다(無有)."라고 했다.

또 왕계에게 말하길(又謂王稽曰): "그대는(謁君) 제후의 객과 더불어(與諸侯客子) 함께 오는 일은(俱來) 없겠지요(得無乎)? 무익한 것들이고(無益), 와서(徒) 남의 나라를 어지럽힐 뿐입니다(亂人國耳)."라고 했다.

왕계가 말하길(王稽曰): "감히 없습니다(不敢)."라고 했다. 바로 헤어져 떠났다(即別去).

범저가 말하길(范睢曰): "제가 듣기로(吾聞) 양후는(穰侯) 지혜로운 선비이고(智士也), 일을 하는 것이 더뎌서(其見事遲), 방금(鄉者) 수레 안에 사람이 있다고 의심하면서도(疑車中有人), 수색하는 것을 잊었습니다(忘索之)."라고 했다.

이에(於是) 범저가(范睢) 마차에서 내려 도망가면서(下車走), 말하길(曰): "이 사람은(此) 반드시(必) 후회하고 있을 겁니다(悔之)."라고 했다.

십여 리를 가서(行十餘里), 과연(果) 기병을 시켜(使騎) 돌아가서(還) 마차 안을 수색하도록 하고(索車中), 빈객이 없자(無客), 이에 그만두었다(乃已). 왕계가(王稽) 마침내(遂) 범저와 함께(與范睢) 함양에 들어갔다(入咸陽). 

 

* 見事遲(견사지): 일을 함에 의심이 많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遲는 '머뭇거리다, 주저하다'란 뜻이다.

* 鄉者(향자): 지금 막. 방금. 鄉은 向과 같다.


5 已報使, 因言曰: "魏有張祿先生, 天下辯士也. 曰『秦王之國危於累卵, 得臣則安. 然不可以書傳也』. 臣故載來." 秦王弗信, 使舍食草具. 待命歲餘. 

5 사신의 일에 대해 보고가 끝나고(已報使), 틈을 타 말하기를(因言曰): "위나라에(魏) 장록선생이 있는데(有張祿先生), 천하의 변사입니다(天下辯士也). 말하기를(曰) 『진왕의 나라가(秦王之國) 달걀 쌓은 것처럼 위태롭지만(危於累卵), <자신을> 신하로 삼으면(得臣則) 안정될 것입니다(安). 그러나(然) 글로 전할 없습니다(不可以書傳也)』라고 했습니다. 신이(臣) 일부러(故) 태워서 왔습니다(載來)."라고 했다. 진왕이 믿지 않고(秦王弗信), 객사로 보내(使舍) 하찮은 음식을 주었다(食草具). 명을 기다린 것이(待命) 일 년여 되었다(歲餘). 

 

* 食草具(식초구): 하찮은 음식. 草具(초구)는 험한 음식물. 具는 음식.


6 當是時, 昭王已立三十六年. 南拔楚之鄢郢, 楚懷王幽死於秦. 秦東破齊. 湣王嘗稱帝, 後去之. 數困三晉. 厭天下辯士, 無所信. 

6 이 때가(當是時), 소왕 36년이었다(昭王已立三十六年). 남으로(南) 초나라의 언과 영을 빼앗고(拔楚之鄢郢), 초 회왕이(楚懷王) 진나라에(於秦) 갇혔다가 죽었다(幽死). 진나라가(秦) 동쪽으로(東) 제나라를 격파했다(破齊). 민왕이(湣王) 일찍이(嘗) 제라고 일컬었지만(稱帝), 나중에 버렸다(後去之). 여러 번(數) 삼진에게 곤란을 당해서(困三晉), 천하의 유세가를 싫어하고(厭天下辯士), 믿지 않았다(無所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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