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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史記)/사기열전(史記列傳)

[史記列傳(사기열전) 80 악의열전(樂毅列傳) 3/3] 인정받지 못하면 떠나라

by प्रज्ञा 2024. 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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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樂閒居燕三十餘年, 燕王喜用其相栗腹之計, 欲攻趙, 而問昌國君樂閒. 樂閒曰: "趙, 四戰之國也, 其民習兵, 伐之不可." 燕王不聽, 遂伐趙. 趙使廉頗擊之, 大破栗腹之軍於鄗, 禽栗腹·樂乘. 樂乘者, 樂閒之宗也. 於是樂閒奔趙, 趙遂圍燕. 燕重割地以與趙和, 趙乃解而去. 

15 악간이(樂閒) 연나라에 머문 것이(居燕) 30여 년인데(三十餘年), 연왕 희가(燕王喜) 재상 율복의 계책을 써서(用其相栗腹之計), 조나라를 공격하려고 하며(欲攻趙, 而) 창국군 악간에게 물었다(問昌國君樂閒).

악간이 말하길(樂閒曰): "조나라는(趙), 사방에서 싸우는 나라로(四戰之國也), 그 백성이 전쟁에 익숙하니(其民習兵), 정벌하는 것은 안됩니다(伐之不可)."라고 했다.

연왕이 듣지 않고(燕王不聽), 마침내(遂) 조나라를 쳤다(伐趙). 조나라가(趙) 염파로 하여금(使廉頗) 습격하도록 해서(擊之), 호에서(於鄗) 율복의 군대를 크게 무찌르고(大破栗腹之軍), 율복과 악승을 사로잡았다(禽栗腹·樂乘). 악승은(樂乘者), 악간의 집안사람이다(樂閒之宗也). 이에(於是) 악간이 조나라로 달아났고(樂閒奔趙), 조나라가(趙) 마침내(遂) 연나라를 포위했다(圍燕). 연나라가(燕) 거듭(重) 땅을 떼어주고(割地以) 조나라와 화친했다(與趙和), 조나라가 이에(趙乃) 포위를 풀고(解而) 물러갔다(去). 

 

* 燕王喜用其相栗腹之計(연왕희용기상율복지계) : 한단(邯鄲)의 포위가 풀린 지 5년이 지나 조나라의 장정들은 장평(長平)의 패전에서 모두 죽고 고아들은 아직 장성하지 못했으니, ‘조趙나라를 치는 것이 좋겠다.’라고 한 승상(丞相) 율복(栗腹)의 계책을 받아들여 연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조나라를 쳤다.

* 四戰之國(사전지국): 지형상() 사방() 어느 곳에서도 적()의 침입()이 가능()한 나라.


16 燕王恨不用樂閒, 樂閒既在趙, 乃遺樂閒書曰: "紂之時, 箕子不用, 犯諫不怠, 以冀其聽;商容不達, 身祇辱焉, 以冀其變. 及民志不入, 獄囚自出, 然後二子退隱. 故紂負桀暴之累, 二子不失忠聖之名. 何者? 其憂患之盡矣. 今寡人雖愚, 不若紂之暴也;燕民雖亂, 不若殷民之甚也. 室有語, 不相盡, 以告鄰里. 二者, 寡人不爲君取也." 

16 연왕이(燕王) 악간을 등용하지 않을 것을 한스럽게 여겨(恨不用樂閒), 악간이 이미 조나라에 있는데(樂閒既在趙), 이에(乃) 악간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길(遺樂閒書曰): "주왕 시절에(紂之時), 기자는(箕子)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不用), 계속 간하기를(犯諫) 게을리하지 않고(不怠, 以) 그(주왕)가 말을 들어주기를 바랐고(冀其聽); 상용도(商容) 받아들여짐에 이르지 못하고(不達), 몸이(身) 다만 치욕을 당했지만(祇辱焉, 以) 그(주왕)가 변하기를 바랐다(冀其變). 백성의 마음이 들어오지 않고(及民志不入), 죄수들이 스스로 나옴에 이르고 나서(獄囚自出, 然後) 두 사람이 물러나 숨었다(二子退隱). 그러므로(故) 주왕이(紂) 흉악하고 포악하다는 허물을(桀暴之累) 받았지만(負), 두 사람은(二子) 충성스럽고 성스러운 이름을 일지 않았다(不失忠聖之名). 어째서인가(何者)? 그(其) <나라를> 걱정하는 것이(憂患之) 다했기 때문이다(盡矣). 지금(今) 과인이 비록 어리석지만(寡人雖愚), 주왕의 난폭함과는 같지 않고(不若紂之暴也); 연나라 백성이 비록 어지럽지만(燕民雖亂), 은나라 백성이 심한 것과 같지 않다(不若殷民之甚也). 집안에(室) 말이 있다지만(有語), 서로 다하지 않고(不相盡, 以) 이웃 마을에 일러바치는 것이다(告鄰里). 두 사람은(二者), 과인寡人不爲君取也." 

 

* 犯諫(범간): 무례하게 간언하다.

* 祇(지욕): 여기서 祇는 只와 같다. '단지, 오직'이란 뜻이다.

* 獄囚(옥수): 옥()에 갇힌 사람.


17 樂閒·樂乘怨燕不聽其計, 二人卒留趙. 趙封樂乘爲武襄君. 

17 악간과 악승이(樂閒·樂乘) 연나라가 그 계책을 들어주지 않은 것을(燕不聽其計) 원망하고(怨), 두 사람이(二人) 끝내(卒) 조나라에 머물렀고(留趙). 조나라는(趙) 악승을 봉해서(封樂乘) 무양군으로 삼았다(爲武襄君). 


18 其明年, 樂乘·廉頗爲趙圍燕, 燕重禮以和, 乃解. 後五歲, 趙孝成王卒. 襄王使樂乘代廉頗. 廉頗攻樂乘, 樂乘走, 廉頗亡入魏. 其後十六年而秦滅趙. 

18 그 다음해에(其明年), 악승과 염파가(樂乘·廉頗) 조나라를 위해(爲趙) 연나라를 포위하고(圍燕), 연나라가(燕) 거듭(重) 예의로(禮以) 화친을 청하자(和), 이에 포위를 풀었다(乃解). 5년 뒤에(後五歲), 조나라 효성왕이 죽었다(趙孝成王卒). 양왕이(襄王) 악승을 시켜(使樂乘) 염파를 대신하게 했다(代廉頗). 염파가 악승을 공격해서(廉頗攻樂乘), 악승이 달아나고(樂乘走), 염파는(廉頗) 도망가(亡) 위나라에 들어갔다(入魏). 그 뒤 16년이 지나(其後十六年而) 진나라가 조나라를 멸망시켰다(秦滅趙). 


19 其後二十餘年, 高帝過趙, 問: "樂毅有後世乎?" 對曰: "有樂叔." 高帝封之樂卿, 號曰華成君. 華成君, 樂毅之孫也. 而樂氏之族有樂瑕公·樂臣公, 趙且爲秦所滅, 亡之齊高密. 樂臣公善修黃帝·老子之言, 顯聞於齊, 稱賢師. 

19 그 뒤(其後) 20여 년이 지나(二十餘年), 고황제가 조나라를 지나가다(高帝過趙), 묻기를(問): "악의에게(樂毅) 후손이 있는가(有後世乎)?"라고 했다.

대답하여 말하길(對曰): "악숙이 있습니다(有樂叔)."라고 했다.

고황제가(高帝) 그를 봉하여(封之) 악경으로 삼고(樂卿), 화성군이라고 불렀다(號曰華成君). 화성군은(華成君), 악의의 손자다(樂毅之孫也). 그리고(而) 악씨의 일족 중에(樂氏之族) 악하공과 악신공이 있는데(有樂瑕公·樂臣公), 조나라가(趙且) 진나라에 망할 무렵(爲秦所滅), 도망가서(亡) 제나라 고밀로 갔다(之齊高密). 악공신이(樂臣公) 황제와 노자의 말을 잘 닦아(善修黃帝·老子之言), 제나라에 이름을 드러내고(顯聞於齊), 현사로 일컬어졌다(稱賢師). 


20 太史公曰:始齊之蒯通及主父偃讀樂毅之報燕王書, 未嘗不廢書而泣也. 樂臣公學黃帝·老子, 其本師號曰河上丈人, 不知其所出. 河上丈人教安期生, 安期生教毛翕公, 毛翕公教樂瑕公, 樂瑕公教樂臣公, 樂臣公教蓋公. 蓋公教於齊高密·膠西, 爲曹相國師. 

20 태사공이 말하길(太史公曰): 처음(始) 제나라의 괴통과(齊之蒯通及) 주보언이(主父偃) 악의의 보연왕성를 읽고(讀樂毅之報燕王書), 일찍이 책을 덮고 울지 않은 적이 없다(未嘗不廢書而泣也). 악신공이(樂臣公) 황제와 노자를 배웠고(學黃帝·老子), 그(其) 원래 스승이(本師) 하상장인이라고 불렸는데(號曰河上丈人), 나온 곳을 알 수 없다(不知其所出). 하상장인이(河上丈人) 안기생을 가르치고(教安期生), 안기생이(安期生) 모흡공을 가르치고(教毛翕公), 모흡공이(毛翕公) 악하공을 가르치고(教樂瑕公), 악하공이 악신공을 가르치고(樂瑕公教樂臣公), 악신공이 개공을 가르쳤다(樂臣公教蓋公). 개공이(蓋公) 고밀과 교서에서 가르쳐서(教於齊高密·膠西), 조 상국의 스승이 되었다(爲曹相國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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