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고사성어(故事成語)

[고사성어(故事成語) 노력(努力) 31] 와신상담(臥薪嘗膽) / 섶나무 가운데 눕고 쓸개를 맛보며 복수를 다짐한다

by प्रज्ञा 2024. 12. 3.
반응형

직역하면 '섶나무(땔감) 위에 누워서 쓸개를 맛본다'는 뜻으로 오나라와 월나라의 왕이 상대에게 복수를 다짐하는 모습에서 유래했습니다. 

 

B.C 496년 오(吳)나라 왕 합려(闔閭)는 이웃한 월(越)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오나라는 월나라 왕 구천(句踐)에게 대패하고 합려는 전투 중 화살에 맞은 상처가 악화되어 치료를 받다가 죽음을 맞습니다. 합려는 아들 부차에게 원수를 갚으라는 유언을 남기고 눈을 부릅뜬 채로 숨을 거둡니다.

 

이 사실을 안 월왕 구천은 선제공격을 감행했지만 가시나무 장작더미 위에서 잠을 자면서 부왕의 원수를 갚아야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하고 철저히 대비를 했던 오나라 부차의 군대에 월나라군이 크게 패했고 결국 회계산(會稽山)으로 도주한 구천은 부차의 신하가 되는 조건으로 항복합니다. 

 

오나라 속국으로 전락한 월나라 왕 구천은 고국으로 돌아오자마자 쓰디쓴 돼지 쓸개를 구해서 방에다 걸어두고 앉을 때나 설 때마다 그 쓸개를 혓바닥으로 핥으면서 회계의 치욕[會稽之恥]을 되새겼습니다. 무려 20년 동안이나 쓸개를 핥으며 기회를 엿보던 구천은 오나라가 방심(放心)한 틈을 타서 오나라를 공격하여 부차에게서 항복(降伏)을 받아내기에 이릅니다.

 

유의어: 상담(嘗膽), 절치액완(切齒扼腕), 회계지치(會稽之恥)

 

壽夢後, 四君而至闔廬, 擧伍員謀國事. 員字子胥, 楚人伍奢之子, 奢誅而奔吳. 以吳兵入郢, 吳伐楚. 闔廬傷而死.子夫差立, 子胥復事之. 夫差志復讐, 朝夕臥薪中, 出入使人呼曰: “夫差而忘越人之殺而父邪?”

수몽(합려의 아버지)이 죽은 뒤에(壽夢後), 네 임금을 거쳐(四君而) 합려에 이르렀고(至闔廬), 오원(오자서)를 등용하여(擧伍員) 나라 일을 도모했다(謀國事). 오원은(員) 자가 자서이고(字子胥), 초나라 사람(楚人) 오사의 아들로(伍奢之子), 오사가 죽임을 당하고(奢誅而) 오나라로 도망쳤다(奔吳).以吳兵) 영에 들어가서(入郢), 오나라가(吳) 초나라를 정벌했다(伐楚). 합려가(闔廬) 부상을 당해서 죽었다(傷而死). 아들(子) 부차가 즉위하고(夫差立), 오자서가(子胥) 다시(復) 그를 섬겼다(事之). 부차가(夫差) 복수에 뜻을 두고(志復讐), 아침저녁으로(朝夕) 섶 가운데 누워서(臥薪中), 드나드는 사람을 시켜(出入使人) 외쳐 말하길(呼曰): “부차(夫差) ) 너는(而) 월나라 사람이(越人之) 너의 아버지를 죽인 것을(殺而父) 잊었는가(邪)?”라고 말하도록 했다.

 

周敬王二十六年, 夫差敗越于夫椒, 越王勾踐, 以餘兵棲會稽山, 請爲臣妻爲妾. 子胥言 “不可” 太宰伯嚭, 受越賂說夫差, “赦越” 越王勾踐反國, 懸膽於坐臥, 卽仰膽嘗之曰: “女忘會稽之恥邪?” 擧國政屬大夫種, 而與范蠡, 治兵事謀吳.

주 경왕(周敬王) 26년에(二十六年), 부차가(夫差) 부초에서(于夫椒) 월나라를 무찌르고(敗越), 월왕 구천이(越王勾踐), 남은 병사를 이끌고(以餘兵) 회계산에 깃들었다가(棲會稽山), <자신은> 신하가 되고(爲臣) 처는 첩이 될 것을(妻爲妾) 청했다(請). 오자서가(子胥) 안된다고 말했다(言不可). 태재 백비가(太宰伯嚭), 월나라의 뇌물을 받고(受越賂) 부차에게(夫差), 월나라를 용서할 것을(赦越) 설득했다(說). 월왕 구천이(越王勾踐) 자기 나라에 돌아가서(反國), 앉고 눕는 자리에(於坐臥) 쓸개를 매달아 두고(懸膽), 곧(卽) 쓸개를 올려보고(仰膽) 그것을 맛보며 말하길(嘗之曰): “너는(女) 회계산의 치욕을 잊었는가(忘會稽之恥邪)?”라고 했다. 모든 국정을(擧國政) 대부 문종에게(大夫種) 맡기고(, 而) 범려와 함께(與范蠡), 군대의 일을 다스리며(治兵事) 오나라를 도모했다(謀吳).

 

太宰嚭, 譖子胥恥謀不用怨望, 夫差乃賜子胥屬鏤之劍. 子胥告其家人曰: “必樹吾墓檟, 檟可材也. 抉吾目懸東門, 以觀越兵之滅吳.” 乃自剄. 差取其尸, 盛以鴟夷, 投之江. 吳人憐之, 立祠江上命曰‘胥山.’ 越十年生聚, 十年敎訓.

태재 백비는(太宰嚭), 오자서가(子胥) 자신의 계책이 쓰이지 않음을 부끄럽게 여기고(恥謀不用) 원망한다고(怨望) 참소해서(譖), 부차가(夫差乃) 오자서에게(子胥) 촉루검을 내렸다(屬鏤之劍).

오자서가(子胥) 그 집안 사람들에게 말하길(告其家人曰): “반드시(必) 내 묘에(吾墓) 오동나무를 심고(檟), 오동나무가(檟) 쓸만해질 것이다(可材也). 내 눈을 도려내(抉吾目) 동문에 걸어서(懸東門, 以) 월나라 군대가(越兵之)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을(滅吳) 볼 수 있도록 해라(觀).”라고 했다.

곧(乃)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自剄). 부차가(差) 그 시신을 가져다가(取其尸), 포대에 담아서(盛以鴟夷), 강에 던졌다(投之江). 오나라 사람들이(吳人) 가련하게 여기고(憐之), 강가에(江上) 사당을 세우고(立祠) 서산이라고 불렀다(命曰‘胥山.’). 월나라가(越) 10년 동안(十年) 백성을 기르고(生) 군사를 모았고(聚), 10년 동안(十年) 가르치고 훈련시켰다(敎訓).

 

* 生聚(생취): 생산()하여 자재()를 모아 저축()함, 백성()을 길러 군사()를 강화()하고 나라를 부()하게 함.

 

周元王四年, 越伐吳, 吳三戰三北. 夫差上姑蘇, 亦請成於越, 范蠡不可. 夫差曰: “吾無以見子胥.” 爲幎冒乃死. 『십팔사략(十八史略)』 「춘추전국(春秋戰國)」 오(吳)

주 원왕 4년에(周元王四年), 월나라가(越) 오나라를 침공했고(伐吳), 오나라가(吳) 세 번 싸워서(三戰) 세 번 졌다(三北). 부차가(夫差) 고소에 올라가(上姑蘇), 또한(亦) 월나라에 화의를 청하니(請成於越), 범려가 안된다고 했다(范蠡不可).

부차가 말하길(夫差曰): “내가(吾) 오자서를 볼 수가 없구나(無以見子胥).”라고 했다. 얼굴을 덮고서(爲幎冒) 죽었다(乃死).

 

* 幎冒(멱모): 소렴()할 때 시체()의 얼굴을 싸매는 헝겊.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