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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史記)/사기열전(史記列傳)

[사기열전(史記列傳) 노자한비열전(老子韓非列傳)] 한비자(韓非子 1/3) / 용의 비늘을 건드리지 말아라

by प्रज्ञा 2023. 1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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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시대의 철학자로 본명은 한비(韓非)이다. 젊어서 진(秦)의 이사(李斯)와 함께 순자(荀子)의 밑에서 동문수학했다. 언변이 뛰어난 이사와 대조적으로 한비자는 말더듬이였다고 한다. 하나 학문에 있어서는 이사가 한비자에 미치지 못했다. 이때 한비자는 법가뿐만 아니라 도가, 유가, 묵가 등 여러 학문을 두루 섭렵하고 법에 의한 부국강병의 논리를 정립했다. <출처: 위키백과>

 

韓非者, 韓之諸公子也. 喜刑名法術之學, 而其歸本於黃老. 非爲人口吃, 不能道說, 而善著書. 與李斯俱事荀卿, 斯自以爲不如非. 

한비는(韓非者), 한나라의(韓之) 여러 공자 중 한 명이다(諸公子也). 형명과 법술의 학문을 좋아했지만(喜刑名法術之學, 而) 그 돌아간 곳은(其歸) 황노에 근본을 두었다(本於黃老). 한비의 사람됨이 말을 더듬어(非爲人口吃), 말을 잘하지 못했지만(不能道說, 而) 글짓기를 잘했다(善著書). 이사와 더불어(與李斯) 함께 순자를 모셨고(俱事荀卿), 이사가(斯) 자신을(自) 한비보다 못하다고 여겼다(以爲不如非). 

 

* 口吃(구걸): 말을 더듬음

 

非見韓之削弱, 數以書諫韓王, 韓王不能用. 於是韓非疾治國不務修明其法制, 執勢以御其臣下, 富國彊兵而以求人任賢, 反舉浮淫之蠹而加之於功實之上. 

한비는(非) 한나라가 쇠약해지는 것을(韓之削弱) 보고(見), 여러 차례(數) 글로(以書) 한왕에게 간언 했지만(諫韓王), 한왕이(韓王) 등용할 수 없었다(不能用). 이에(於是) 한비가(韓非) 나라를 다스리는데(治國) 그 법과 제도를 닦아 밝히고(修明其法制), 권세를 잡아(執勢以) 그 신하를 부리고(御其臣下), 부국강병하여(富國彊兵而以) 인재를 구해 현명한 사람을 임명하는데(求人任賢)  힘쓰지 않고(不務), 도리어(反) 쓸모없는 소인배를 등용하여(舉浮淫之蠹而) 공로와 실적 있는 사람의 위에(於功實之上) 그들을 더하는 것을(加之) 싫어했다(疾).

 

浮淫之蠹(부음지두) : 쓸모없는 소인배. 학문으로 유세를 하는 자들. 浮淫(부음)은 들뜨고 음란함. 蠹(두)는 좀벌레를 말한다.

 

以爲儒者用文亂法, 而俠者以武犯禁. 寬則寵名譽之人, 急則用介胄之士. 今者所養非所用, 所用非所養. 悲廉直不容於邪枉之臣, 觀往者得失之變, 故作孤憤·五蠹·內外儲·說林·說難十餘萬言. 

유자는(儒者) 글을 써서(用文) 법을 어지럽히고(亂法, 而) 협자는(俠者) 무력으로(以武) 금령을 어긴다고(犯禁) 여겼다(以爲). <나라가> 태평할 때면(寬則) 명예를 좇는 살마을 총애하고(寵名譽之人), 위급할 때면(急則) 갑옷 입고 투구 쓴 무사를 등용한다(用介胄之士). 지금(평소)(今者) 기르는 사람은(所養) <위급할 때> 쓸모 있는 사람이 아니고(非所用), 쓸모 있는 사람은(所用) <평소에> 기른 사람이 아니다(非所養). 청렴하고 결백한 신하들이(廉直) 간사하고 사악한 신하들에게(於邪枉之臣) 받아들여지지 않음을(不容) 슬퍼하고(悲), 지나간 <왕의> 성공과 실패의 변화를 살폈고(觀往者得失之變), 그러므로(故) 고운, 오두, 내저설, 설림, 세난 등 10여 편의 말을 지었다(作孤憤·五蠹·內外儲·說林·說難十餘萬言). 

 

* 寬(관) : 느슨하다는 뜻으로 나라가 태평할 때를 말함.

* 介胄(개주): 갑옷(-)과 투구를 아울러 이르는 말.

* 廉直(염직): 청렴(淸廉)하고 결백(潔白)함.

 

然韓非知說之難, 爲說難書甚具, 終死於秦, 不能自脫. 

그러나(然) 한비가(韓非) 유세의 어려움을 알고(知說之難), 세난의 글을(爲說難書) 매우 갖추어지었지만(甚具), 끝내(終) 진나라에서 죽었으니(死於秦), 스스로 <위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不能自脫).


* 不能自脫: 진시황은 한비가 지은 고분孤憤과 오두五蠹라는 글을 읽고 “이것이야 말로 내가 기다렸던 것이다. 내가 이 사람을 만날 수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다”며 감탄을 했다고 한다. 이사李斯는 진시황에게 "한나라를 공격하면면 반드시 한비를 사신으로 보낼 것이고, 그때 한비를 얻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진나라가 한나라를 공격하자 예상대로 한나라는 한비를 진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하지만 친구인 이사는 진시황이 한비를 중용할 것을 두려워 왕에게 모함했는데 진시황은 한비의 인물됨을 아껴 투옥으로 무마하려 했다. 이사는 옥에 갇힌 한비에게 독약을 보내 자살을 종용한다. 한비는 진시황을 만나길 원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당시 그의 나이 47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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