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관(傅寬)
1. 陽陵侯傅寛, 以魏五大夫騎將從, 爲舍人, 起橫陽. 從攻安陽ㆍ杠里, 擊趙賁軍於開封, 及擊楊熊曲遇ㆍ陽武, 斬首十二級, 賜爵卿. 從至霸上. 沛公立爲漢王, 漢王賜寛封號共德君. 從入漢中, 遷爲右騎將. 從定三秦, 賜食邑雕陰. 從擊項籍, 待懷, 賜爵通德侯. 從擊項冠ㆍ周蘭ㆍ龍且, 所將卒斬騎將一人敖下, 益食邑.
1. 양릉후 부관은(陽陵侯傅寛), 위나라 오대부 기장으로(以魏五大夫騎將) <패공을> 따르다(從), 가신이 되었고(爲舍人), 횡양에서 봉기했다(起橫陽). <패공을> 따라(從) 안양과 두리를 공격하고(攻安陽ㆍ杠里), 개봉에서 조분의 군사를 공격했고(擊趙賁軍於開封, 及) 공우와 양무에서 양웅을 공격하고(擊楊熊曲遇ㆍ陽武), 12명의 머리를 베고(斬首十二級), 경 작위를 받았다(賜爵卿). 다라서(從) 패상에 이르렀다(至霸上). 패공이 즉위해서(沛公立) 한왕이 되었고(爲漢王), 한왕이(漢王) 부관에게 봉지를 주어(賜寛封) 공덕군이라 불렀다(號共德君). 따라서(從) 한중에 들어갔다가(入漢中), 옮겨서(遷) 우기장이 되었다(爲右騎將). 따라서(從) 삼진을 평정하고(定三秦), 식읍으로 주음을 받았다(賜食邑雕陰). 따라서 항적을 공격하고(從擊項籍), 회현에서 기다려(待懷), 통덕후의 작위를 받았다(賜爵通德侯). 다라서(從) 항관과 주란, 용저를 치고(擊項冠ㆍ周蘭ㆍ龍且), 이끄는 병사가(所將卒) 오창에서(敖下) 기장 한 명을 베어(斬騎將一人), 식읍을 더해주었다(益食邑).
* 五大夫(오대부): 9등급에 해당하는 작위
* 舍人(사인): 가신(家臣).
2. 屬淮陰, 擊破齊歷下軍, 擊田解. 屬相國參, 殘博, 益食邑. 因定齊地, 剖符世世勿絶, 封爲陽陵侯, 二千六百戸, 除前所食. 爲齊右丞相, 備齊. 五歲爲齊相國. 四月, 擊陳豨, 屬太尉勃, 以相國代丞相噲擊豨. 一月, 徙爲代相國, 將屯. 二歲, 爲代丞相, 將屯. 孝惠五年卒, 謚爲景侯. 子頃侯精立, 二十四年卒. 子共侯則立, 十二年卒. 子侯偃立, 三十一年, 坐與淮南王謀反, 死, 國除.
2. 회음후에게 소속되어(屬淮陰), 제나라 역하의 군대를 쳐서 깨뜨리고(擊破齊歷下軍), 전해를 공격했다(擊田解). 상국 조참에게 속해서(屬相國參), 박을 쳐서(殘博), 식읍을 더했다(益食邑). 이어(因) 제나라 땅을 평정하고(定齊地), 부절을 주어(剖符) 대대로 끊어지지 않도록 하고(世世勿絶), 봉하여(封) 양릉후로 삼고(爲陽陵侯), 2600호를 주고(二千六百戸), 앞의 식읍으로 삼은 것을 없앴다(除前所食). 제나라 우승상이 되어(爲齊右丞相), 제나라를 지켰다(備齊). 5년이 지나(五歲) 제나라 상국이 되었다(爲齊相國). 4월에(四月), 진희를 치고(擊陳豨), 태위 주발에게 소속되어(屬太尉勃), 상국으로(以相國) 승상 번쾌를 대신해서(代丞相噲) 진희를 쳤다(擊豨). 1월에(一月), 옮겨서(徙) 대의 상국이 되었고(爲代相國), 국경 수비군을 이끌었다(將屯). 2년이 지나(二歲), 대의 승상이 되었고(爲代丞相), 둔병을 이끌었다(將屯). 효혜 5년에 죽었고(孝惠五年卒), 시호는(謚) 경후가 되었다(爲景侯). 아들(子) 경후 정이(頃侯精) 이었는데(立), 24년 만에 죽었다(二十四年卒). 아들(子) 공후 칙이 이었고(共侯則立), 20년 만에 죽었다(十二年卒). 아들 후 언이 이었는데(子侯偃立), 31년 만에(三十一年), 회남왕의 모반에 연루되어(坐與淮南王謀反), 죽었고(死), 나라가 없어졌다(國除).
* 剖符(부부): ‘부절(符節)을 쪼갠다.’는 뜻으로, 제후(諸侯)를 봉(封)함을 이르는 말.
근흡(靳歙)
3. 信武侯靳歙, 以中涓從, 起宛朐. 攻濟陽. 破李由軍. 擊秦軍亳南ㆍ開封東北, 斬騎千人將一人, 首五十七級, 捕虜七十三人, 賜爵封號臨平君. 又戰藍田北, 斬車司馬二人, 騎長一人, 首二十八級, 捕虜五十七人. 至霸上. 沛公立爲漢王, 賜歙爵建武侯, 遷爲騎都尉. 從定三秦. 別西擊章平軍於隴西, 破之, 定隴西六縣, 所將卒斬車司馬ㆍ候各四人, 騎長十二人. 從東擊楚, 至彭城. 漢軍敗還, 保雍丘, 去擊反者王武等. 略梁地, 別將擊邢說軍菑南, 破之, 身得說都尉二人, 司馬ㆍ候十二人, 降吏卒四千一百八十人. 破楚軍滎陽東. 三年, 賜食邑四千二百戸.
3. 신무후 근흡은(信武侯靳歙), 중연으로(以中涓) <패공을> 따라서(從), 완구에서 봉기했다(起宛朐). 제양을 공격했다(攻濟陽). 이유의 군대를 격파했다(破李由軍). 박의 남쪽과 개봉 동북쪽에서(亳南ㆍ開封東北) 진군을 쳤고(擊秦軍), 기병 1000명과 장수 한 명을 죽이고(斬騎千人將一人), 57명의 머리를 베고(首五十七級), 73명을 포로로 잡아(捕虜七十三人), 작위를 받아 봉해져(賜爵封) 임평군으로 불렸다(號臨平君). 또(又) 남전 북쪽에서 싸워(戰藍田北), 거사마 2명과 기장 1명을 죽이고(斬車司馬二人, 騎長一人), 27명의 머리를 베고(首二十八級), 57명을 사로잡았다(捕虜五十七人). 패상에 이르러(至霸上), 패공이 즉위해서 한왕이 되었고(沛公立爲漢王), 흡에게 작위를 주어(賜歙爵) 건무후가 되었고(建武侯), 옮겨서(遷) 기도위가 되었다(爲騎都尉). 따라서(從) 삼진을 평정했다(定三秦). 따로(別) 서쪽으로(西) 농서에서(於隴西) 장평의 군대를 치고(擊章平軍), 격파해서(破之), 농서 6현을 평정하고(定隴西六縣), 이끄는 병사가(所將卒) 거사마와 후 각각 4명, 기장 20명을 베었다(斬車司馬ㆍ候各四人, 騎長十二人). 따라서(從) 동쪽으로(東) 초나라를 치고(擊楚), 팽성에 이르렀다(至彭城). 한나라 군대가(漢軍) 패하여 되돌아갈 때(敗還), 옹구를 지키고(保雍丘), 떠나서(去) 배반한 사람인 왕무 등을 쳤다(擊反者王武等). 양나라 땅을 공략하고(略梁地), 따로(別) 이끌고(將) 치현 남쪽에서 형열의 군사를 쳐서(擊邢說軍菑南), 격파하고(破之), 직접(身) 형열의 도위 2 사람과(得說都尉二人), 사마, 후 12명을 잡았고(司馬ㆍ候十二人), 관리와 병사 4680명을 항복시켰다(降吏卒四千一百八十人). 형양 동쪽에서 초나라 군사를 격파했다(破楚軍滎陽東). 3년이 지나(三年), 식읍 4200호를 받았다(賜食邑四千二百戸).
* 中涓(중연): 황제 주변에 가까이 있으면서 궁궐의 청소를 담당했던 사람으로 곧 환관(宦官)을 가리킴. 中은 금중(禁中), 涓은 청결을 뜻함.
4. 別之河內, 擊趙將賁郝軍朝歌, 破之, 所將卒得騎將二人, 車馬二百五十匹. 從攻安陽以東, 至棘蒲, 下七縣. 別攻破趙軍, 得其將司馬二人, 候四人, 降吏卒二千四百人. 從攻下邯鄲. 別下平陽, 身斬守相, 所將卒斬兵守ㆍ郡守各一人, 降鄴. 從攻朝歌ㆍ邯鄲, 及別擊破趙軍, 降邯鄲郡六縣. 還軍敖倉, 破項籍軍成皐南, 擊絶楚饟道, 起滎陽至襄邑. 破項冠軍魯下. 略地東至繒ㆍ郯ㆍ下邳, 南至蘄ㆍ竹邑. 擊項悍濟陽下. 還擊項籍陳下, 破之. 別定江陵, 降江陵柱國ㆍ大司馬以下八人, 身得江陵王, 生致之雒陽, 因定南郡. 從至陳, 取楚王信, 剖符世世勿絶, 定食四千六百戸, 號信武侯.
4. 따로(別) 하내로 가서(之河內), 조가에서(朝歌) 조나라 장수 분학의 군사를 쳐서(擊趙將賁郝軍), 깨뜨렸는데(破之), 이끄는 병사가(所將卒) 기장 2명과 거마 250마리를 얻었다(得騎將二人, 車馬二百五十匹). 따라서(從) 안양을 공격하고(攻安陽以) 동쪽으로(東), 극포에 이르러(至棘蒲), 7개 현을 함락시켰다(下七縣). 따로(別) 조나라 군사랄 공격해서 격파하고(攻破趙軍), 장수와 사마 2명과 후 4명을 붙잡고(得其將司馬二人, 候四人), 관리와 병사 2400명을 항복시켰다(降吏卒二千四百人). 따라서(從) 한단을 공격해서 함락시켰다(攻下邯鄲). 별도로(別) 평양을 함락시키고(下平陽), 직접(身) 수상을 베고(斬守相), 이끄는 병사가(所將卒) 병수와 군수 1명씩을 베어(斬兵守ㆍ郡守各一人), 업을 항복시켰다(降鄴). 따라서(從) 조가와 한단을 공격했고(攻朝歌ㆍ邯鄲), 별도로(及別) 조나라 군사를 쳐서 깨뜨리고(擊破趙軍), 한단군의 6개 현을 항복시켰다(降邯鄲郡六縣). 오창으로(敖倉) 군사를 돌려(還軍), 성고 남쪽에서(成皐南) 항적의 군사를 격파하고(破項籍軍), 초나라 보급로를 공격해서 끊고(擊絶楚饟道), 형양에서 시작해서 양읍에 이르렀다(起滎陽至襄邑). 노현 아래서(魯下) 항관의 군사를 격파했다(破項冠軍). 땅을 공략해서(略地) 동쪽으로(東) 증과 담, 하비에 이르고(至繒ㆍ郯ㆍ下邳), 남쪽으로 기현과 죽읍에 이르렀다(南至蘄ㆍ竹邑). 제양 아래서(濟陽下) 항한을 쳤다(擊項悍). 돌아와(還) 진 근처에서 항적을 치고(擊項籍陳下), 격파했다(破之). 별도로(別) 강릉을 평정하고(定江陵), 강릉 주국과 대사마 아래 8명을 항복시키고(降江陵柱國ㆍ大司馬以下八人), 직접(身) 강릉왕을 사로잡아(得江陵王), 살려서(生) 낙양으로 보내고(致之雒陽), 이어(因) 남군을 평정했다(定南郡). 따라서(從) 진현에 이르러(至陳), 초왕 신을 잡고(取楚王信), 부절이(剖符) 대대로 이어져(世世) 끊어지지 않고(勿絶), 식읍 4600호를 정해주고(定食四千六百戸), 신무후라고 불렀다(號信武侯).
5. 以騎都尉從擊代, 攻韓信平城下, 還軍東垣. 有功, 遷爲車騎將軍, 竝將梁ㆍ趙ㆍ齊ㆍ燕ㆍ楚車騎, 別擊陳豨丞相敞, 破之, 因降曲逆. 從擊黥布有功, 益封定食五千三百戸. 凡斬首九十級, 虜百三十二人: 別破軍十四, 降城五十九, 定郡ㆍ國各一, 縣二十三: 得王ㆍ柱國各一人, 二千石以下至五百石三十九人. 高后五年, 歙卒, 謚爲肅侯. 子亭代侯. 二十一年, 坐事國人過律, 孝文後三年, 奪侯, 國除.
5. 기도위로(以騎都尉) 따라서(從) 대를 치고(擊代), 평성 근처에서 한신을 공격했고(攻韓信平城下), 돌아와(還) 동환에 군사를 주둔했다(軍東垣). 공이 있어(有功), 옮겨서(遷) 거기장군이 되었고(爲車騎將軍), 양과 조, 제, 연, 초의 거리를 모두 거느리고(竝將梁ㆍ趙ㆍ齊ㆍ燕ㆍ楚車騎), 별도로(別) 진희의 승상 후창을 쳐서(擊陳豨丞相敞), 깨뜨리고(破之), 이어(因) 곡역을 항복시켰다(降曲逆). 따라서(從) 경포를 치는 것에(擊黥布) 공이 있어(有功), 봉을 더해서(益封) 식읍 5300호를 정해주었다(定食五千三百戸). 모두(凡) 90명의 머리를 베고(斬首九十級), 132명을 포로로 잡았고(虜百三十二人): 별도로(別) 군사를 깨뜨린 것이(破軍) 14번이고(十四), 성을 항복시킨 것이(降城) 59개이고(五十九), 국군 각 1명과 현 23개를 평정했고(定郡ㆍ國各一, 縣二十三): 왕과 주국 각 1명과 <봉록> 2천 석 이하부터 5백 석에 이르는 사람 39명을 사로잡았다(得王ㆍ柱國各一人, 二千石以下至五百石三十九人). 고후 5년에(高后五年), 근흡이 죽고(歙卒), 시호가(謚) 숙후가 되었다(爲肅侯). 아들 정이(子亭) 후를 이었다(代侯). 21년이 지나(二十一年), 법령을 넘겨(過律) 사람에게 일을 시킨 죄로(坐事國人), 효문제 후원 3년에(孝文後三年), 후를 박탈당하고(奪侯), 나라가 없어졌다(國除).
* 過律(과률): 율령(律令)과 규정(規定)을 초과하다.
괴성후 주설(蒯成侯 周緤)
6. 蒯成侯緤者, 沛人也, 姓周氏. 常爲高祖參乘, 以舍人從起沛. 至霸上, 西入蜀ㆍ漢, 還定三秦, 食邑池陽. 東絶甬道, 從出度平陰, 遇淮陰侯兵襄國, 軍乍利乍不利, 終無離上心. 以緤爲信武侯, 食邑三千三百戸. 高祖十二年, 以緤爲蒯成侯, 除前所食邑. 上欲自擊陳豨, 蒯成侯泣曰: “始秦攻破天下, 未嘗自行. 今上常自行, 是爲無人可使者乎?” 上以爲“愛我” , 賜入殿門不趨, 殺人不死. 至孝文五年, 緤以壽終, 謚爲貞侯. 子昌代侯, 有罪, 國除. 至孝景中二年, 封緤子居代侯. 至元鼎三年, 居爲太常, 有罪, 國除.
6. 괴성후 주설은(蒯成侯緤者), 패 사람으로(沛人也), 성이 주씨다(姓周氏). 늘(常) 고조의 참승이었고(爲高祖參乘), 사인으로(以舍人) 따라서(從) 패에서 봉기했다(起沛). 패상에 이르러(至霸上), 서쪽으로(西) 촉과 한에 들어가(入蜀ㆍ漢), 돌아와(還) 삼진을 평정하고(定三秦), 지양을 식읍으로 받았다(食邑池陽). 동쪽으로(東) 보급로를 끊고(絶甬道), 따라서(從) 평읍에서 나와 건너(出度平陰), 양국에서 회음후의 군사를 만났고(遇淮陰侯兵襄國), 싸움이(軍) 잠시 유리하거나(乍利) 잠시 불리하거나(乍不利), 끝내(終) 황제의 마음을 떠나는 일이 없었다(無離上心). 주설을(以緤) 신무후로 삼고(爲信武侯), 3300호를 식읍으로 주었다(食邑三千三百戸). 고조 12년에(高祖十二年), 주설이(以緤) 괴성후가 되었고(爲蒯成侯), 이전의 식읍을 없앴다(除前所食邑).
황제가(上) 직접 진희를 치려고 할 때(欲自擊陳豨), 괴성후가 울며 말하길(蒯成侯泣曰): “애초(始) 진나라가(秦) 천하를 쳐서 격파할 때(攻破天下), 일찍이 <황제가> 직접 행차한 적이 없습니다(未嘗自行). 지금(今) 황제가(上) 늘 스스로 행하니(常自行), 이것은(是) 쓸만한 사람이 없기 때문인가요(爲無人可使者乎)?”라고 했다.
황제가(上) 나를 사랑한다고 여기고(以爲“愛我”), 궁전 물에 들어와서(入殿門) 빨리 걷지 않고(不趨), 사람을 죽여도 죽이지 않는다는 것을(殺人不死) 내렸다(賜). 효문제 5년에(至孝文五年), 주설이(緤) 수명대로 죽고(以壽終), 시호가(謚) 정후가 되었다(爲貞侯). 아들 창이(子昌) 후를 이었고(代侯), 죄가 있어(有罪), 나라가 없어졌다(國除). 효경제 중원 2년에(至孝景中二年), 주설의 아들 거를 봉해서(封緤子居) 후를 이었다(代侯). 원정 3년에(至元鼎三年), 거가(居) 태상이 되었다가(爲太常), 죄가 있어(有罪), 나라가 없어졌다(國除).
* 參乘(참승): 참승(驂乘), 높은 사람을 모시고 탐(陪乘). 경호원
* 甬道(용도): 양쪽에 담을 쌓은 길. 즉 식량을 운반하는 길.
7. 太史公曰: 陽陵侯傅寛ㆍ信武侯靳歙皆高爵, 從高祖起山東, 攻項籍, 誅殺名將, 破軍降城以十數, 未嘗困辱, 此亦天授也. 蒯成侯周緤操心堅正, 身不見疑, 上欲有所之, 未嘗不垂涕, 此有傷心者然, 可謂篤厚君子矣.
7. 태사공이 말하길(太史公曰): 양릉후 부관과 신무후 근흡은(陽陵侯傅寛ㆍ信武侯靳歙) 모두(皆) 높은 작위를 받았고(高爵), 고조를 따라(從高祖) 산동에서 일어나(起山東), 항적을 공격하고(攻項籍), 이름난 장수를 죽였으며(誅殺名將), 군대를 격파하고(破軍) 성을 항복시킨 것이(降城) 수십 개이며(以十數), 일찍이 곤욕을 당한 적이 없으니(未嘗困辱), 이것도 또한(此亦) 하늘이 내린 것이다(天授也). 괴성후 주설은(蒯成侯周緤) 마음을 붙잡고(操心) 굳고 바르게 해서(堅正), 직접(身) 의심받지 않았고(不見疑), 황제가(上) 하려는 것이 있으면(欲有所之), 일찍이 울지 않은 적이 없으니(未嘗不垂涕), 이것에(此) 마음이 상하게 하는 것이 있는 듯하니(有傷心者然), 독실하고 두터운 군자라고 할만하다(可謂篤厚君子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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