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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진보(古文眞寶) 후집

[고문진보(古文眞寶) 후집 38] 한유(韓愈) 송양거원소윤서(送楊巨源少尹序) - 소윤 양거원을 보내며

by प्रज्ञा 2024. 1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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昔疏廣ㆍ受二子, 以年老, 一朝辭位而去. 于時公卿, 設供帳祖道都門外, 車數百兩, 道路觀者, 多歎息泣下, 共言其賢. 漢史旣傳其事, 而後世工畵者, 又圖其迹, 至今照人耳目, 赫赫若前日事.

옛날(昔) 소광과 소부(疏廣受) 두 사람이(二子), 나이 들어 늙어서(以年老), 하루아침에(一朝) 벼슬을 버리고(辭位而) 떠났다(去). 당시(于時) 공경들이(公卿), 장막을 치고 잔치를 벌여(設供帳) 도성 문 밖에서(都門外) 송별연을 했는데(祖道), 마차가(車) 수백 대이고(數百兩), 도로에서(道路) 보는 사람은(觀者), 대부분 탄식하고(多歎息) 눈물 흘리며(泣下), 그 현명함을 함께 말했다(共言其賢). 한나라 역사가(漢史) 그 일을 전한 뒤로(旣傳其事, 而後) 세상의 그림 그리는 사람이(世工畵者), 또(又) 그 자취를 그려서(圖其迹), 지금에 이르러(至今) 사람들의 귀와 눈에 비치는데(照人耳目), 어제 일처럼(若前日事) 환하게 빛난다(赫赫).

 

* 楊巨源(양거원): 당나라 중기 하중(河中) 사람. 자는 경산(景山)이다. 덕종(德宗) 정원(貞元) 5년(789) 진사에 급제했다. 처음에 장홍정(張弘靖)의 종사(從事)가 되었다가 비서랑(秘書郞)과 태상박사(太常博士), 우부원외랑(虞部員外郞)을 지내고, 외직으로 나가 봉상소윤(鳳翔少尹)이 되었다. 목종(穆宗) 때 다시 불려 국자사업(國子司業)에 올랐는데, 개성(開成) 5년(840) 무렵 일흔의 나이로 치사(致仕)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양거원 [楊巨源] (중국역대인명사전, 2010. 1. 20., 임종욱, 김해명)

* 疏廣受(소광수): 한나라 9대 황제인 선제(宣帝) 때 태자의 스승이었던 소광(疏廣)과 소수(疏受)는 태자가 12살이 되어 『論語』와 『孝經』을 통독하고 회양왕으로 봉해지자 스승으로서의 역할이 끝났음을 알고 , 더 높은 벼슬자리를 천거하는 것도 물리친 채 고향땅에서 여생을 즐겼다.

* 供帳(공장): 장막을 치다. 

* 祖道(조도): 먼 길 떠날 때, 도중()의 무사()함을 빌기 위()하여 노신에게 비는 일.

* 赫赫(혁혁): 공로()나 업적() 따위가 뚜렷함, 빛 따위가 밝게 빛남.

 

國子司業楊君巨源, 方以能詩, 訓後進, 一旦, 以年滿七十, 亦白丞相, 去歸其鄕. 世常說‘古今人不相及,’ 今楊與二疏, 其意豈異也? 予忝在公卿後, 遇疾不能出. 不知楊侯去時, 城門外送者幾人, 車幾兩, 馬幾駟, 道傍觀者亦有歎息知其爲賢與否, 而太史氏又能張大其事爲傳, 繼二疏蹤跡否. 不落莫否. 見今世, 無工畵者, 而畵與不畵, 固不論也. 然吾聞楊侯之去, 丞相有愛而惜之者, 白以爲其都少尹, 不絶其祿. 又爲歌詩以勸之, 京師之長於詩者, 亦屬而和之. 又不知當時二疏之去, 有是事否. 古今人同不同未可知也.

국자사업(國子司業) 양군 거원은(楊君巨源), 마침(方) 시를 잘 지었고(以能詩), 후진을 가르쳤는데(訓後進), 하루아침에(一旦), 나이가 70이 찼기 때문에(以年滿七十), 또한(亦) 승상에게 말하고(白丞相),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다(去歸其鄕). 세상 사람들이(世) 늘 말하길(常說) ‘옛사람과 지금 사람이(古今人) 서로 미치지 못한다(不相及)’라고 하는데, 지금(今) 양거원과(楊與) 두 소씨는(二疏), 그 뜻이(其意) 어찌 다르겠는가(豈異也)?

내가(予) 외람되게(忝) 공경의 뒤에 있다가(在公卿後), 병을 만나(遇疾) 나갈 수 없었다(不能出). 양후가(楊侯) 떠난 때를(去時) 알지 못하겠으나(不知), 성문 밖에서(城門外) 전송한 사람이(送者) 몇 명이며(幾人), 마차가 몇 대이고(車幾兩), 말이 몇 필이며(馬幾駟), 도로 가에서(道傍) 구경한 사람들도(觀者) 또한(亦) 탄식하며(有歎息) 그 현명한지 아닌지를 알아주었는 아닌지 모르지만(知其爲賢與否, 而) 사관들은(太史氏) 또한(又) 그 일을 과장해서(能張大其事) 전하니(爲傳), 두 소씨의 발자취를 이은 것이 아니겠는가(繼二疏蹤跡否). 쓸쓸하지 않았는가(不落莫否).

지금 세상을 보면(見今世),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이 없고(無工畵者, 而) 그렸거나(畵與) 그리지 않은 것은(不畵), 참으로(固) 논하지 않을 것이다(不論也). 그러나(然) 내가 듣기로(吾聞) 양후가 떠난 것은(楊侯之去), 승상에게도(丞相) 아끼고 안타까워하는 것이 있어(有愛而惜之者), 아뢰어(白以) 그 고을 소윤으로 삼고(爲其都少尹), 그 녹봉을 끊이지 않게 했다(不絶其祿). 또(又) 노래와 시를 지어(爲歌詩以) 그를 격려하고(勸之), 서울의(京師之) 시에 능한 사람도(長於詩者), 또한(亦) 따라서(屬而) 화답했다(和之). 또(又) 당시(當時) 두 소씨가 떠날 때(二疏之去), 이런 일이 있었는지(有是事否) 알지 못하겠으니(不知), 옛사람과 지금 사람의(古今人) 같고 다른 것을(同不同未) 알 수 없다(可知也).

 

* 忝(첨): 더럽히다, 수치, 겸사(: 겸손의 말).

* 落莫(낙막): 쓸쓸하다, 적막하다. 


中世士大夫, 以官爲家, 罷則無所於歸. 楊侯始冠, 擧於其鄕, 歌「鹿鳴」而來也. 今之歸, 指其樹曰: “某樹吾先人之所種也, 某水某丘吾童子時所釣遊也,” 鄕人莫不加敬, 誡子孫, “以楊侯不去其鄕爲法,” 古之所謂: ‘鄕先生沒而可祭於社’者, 其在斯人歟. 其在斯人歟.

중세의(中世) 사대부가(士大夫), 관청을(以官) 집으로 삼고(爲家), 물러나면(罷則) 돌아갈 곳이 없다(無所於歸). 양후가(楊侯) 비로소 20살이 되어(始冠), 그 고을에서 천거되어(擧於其鄕), 녹명을 노래하며(歌「鹿鳴」而) <과거를 보러> 왔다(來也).

지금 돌아가며(今之歸), 그 나무를 가리켜 말하길(指其樹曰): “저 나무는(某樹) 나의 선친이(吾先人之) 심은 것이고(所種也), 저 물과(某水) 저 구릉은(某丘) 내가 어릴 때(吾童子時) 낚시하고 놀던 곳이다(所釣遊也)”라고 했으니, 마을 사람 가운데(鄕人) 누구도(莫) 더욱 공경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不加敬), 자손에게 경계하기를(誡子孫), “양후가 그 고향을 버리지 않은 것으로(以楊侯不去其鄕) 본받음을 삼아라(爲法)”라고 해서, 옛날의 이른바(古之所謂): ‘고향의 선생으로(鄕先生) 죽어서(沒而) 사에서 제사 지낼 수 있는(可祭於社)’ 사람이란(者), 이런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其在斯人歟). 이런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其在斯人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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